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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Z Oct 03. 2023

만년필과 지킴이


잉크가 번진다. 얼어있던 마음속 눈물이 천천히 녹아내린다. 파란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은 하얀 종이인데 왜 내 가슴에 파란 눈물이 이는 것이었는지..... 더디지만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위 논문의 심사 위원 서명을 받으러 간 그날 가죽 필통 안에 줄줄이 만년필을 넣어두고 그중 하나를 고르며 설레하는 얼굴을 보았다. 어쩐지 모르게 심사가 진행되는 내내 나를 긴장하게 했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들이 엄정한 표정 뒤에서 실은 나보다 더 긴장하며 내가 무사히 그 과정을 마치기를 누구보다 더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면서 또 하나 더 알게 된 것이 있었다. 글자는 내가 채웠으나 그 과정 과정은 나를 조용히 지켜보며 응원해 준 모든 이들의 노고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었다. 

심사 위원과 함께 손부채질을 하며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던 사이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했었는데. 더디게 마르는 잉크처럼 끝도 더디게 오는 것인지 인준지 위 서명이 남겨진 것은 오래전인데 어쩐지 잉크는 이제야 마른 것 같다. 인준지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 나인지 인준지가 내 손을 쥐고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섯 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이 어쩐지 너무 무겁게 느껴져 내내 입김을 불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 기억에 선명히 남겨져 있을 뿐이다. 

더디게 마르는 잉크의 이미지가 기억 깊이 새겨져 있었던 모양인지, 아니면 때맞춰 만년필을 선물 받았기 때문인지 올해부터 부지런히 만년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기장이 몇 개는 되니 거기에 맞춰 일기를 쓰려면 꽤 자주 만년필을 분해했다 조립하기는 반복해야 한다. 잉크도 사야 하고 그걸 주기적으로 넣어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만년필을 의외로 꽤 잘 활용하고 있다. 성실하게 잉크 채움이 역할을 해내며 생각한다. 만년필이 매력적이게 느껴지는 것은 허투루 시간을 날려버린 것이 아니라 줄어든 잉크만큼 뭔가를 채워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탭과 펜이 있음에도 만년필의 잉크를 채우는 시간을 들여가며 느림의 매력을 배워간다. 잉크병을 열며 쓸 것을 떠올렸다가 잉크를 채우며 생각을 정리하고 펜촉을 내려놓으며 생각을 형상화한다. 만년필은 그런 나의 노력이 가상하다는 듯 종이를 뚫을 것 같은 뾰족함과 펜촉이 종이에 닿을 때의 사각거림과 번지는 잉크가 만들어내는 묘한 어우러짐으로 자꾸만 뭔가를 쓰고 싶게 만들어 준다. 

쓰고 읽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멍해졌던 시간이 만년필의 부드러운 촉감으로 채워져 간다. 느림을 더해볼까 하는 욕심에 노트와 만년필을 검색해 보는 시간도 늘었다. 색색의 만년필을 볼 때면 달리는 데 집중해 방향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 손에 쥐여준 만년필을 떠올린다. 숨죽여 만년필을 고르고 서명을 연습하고 숨을 멎은 채 서명하던 그 모든 순간의 공기를 되살려내 본다. 그 모든 게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졌을지 모르겠으나 여하간 성실히 전진하고 있었던 내 지난날을 비춰내 준다. 

지나온 길목마다 사람들이 서 있다. 누군가는 만년필을 들고서, 누군가는 책을 들고서, 누군가는 지도를 들고서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누구의 길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 길의 지킴이를 자청한 사람들이 내게 준 만큼의 마음을 나도 누군가에게 내주며 살아왔었나 하고 지난날을 뒤돌아보게 된다. 채워서 덜어낸 잉크보다 채워 덜어내야 할 잉크가 더 많이 보임은 준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많아서 일 것이다. 

잉크를 채운다. 만년필을 쥔다. 손을 움직이며 생각한다. 내줄 게 있으려면 부지런히 채워야 한다고. 지금은 의미를 찾을 때가 아니라 부단히 손을 움직여야 할 때라고. 


René Magritte_This Is Not a Pipe_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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