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옷이나 화려한 화장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나에게는 의미가 없다. 거울을 잘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학생들이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진정성으로 똘똘 뭉친 표정으로 학생들 가르치는 나를 찍은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사진을 앞에 두고 반성이라는 두 자를 떠올렸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때로는 일종의 극일 수 있는데 지나치게 연기력만으로 승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극적으로 바뀌었냐 하면 그것은 또 그렇지 않았다. 화장은 여전히 잘하지 않았고 기껏 노력했다는 게 새 원피스 몇 벌을 사 둔 것 정도였다. 나이를 먹으면 화장을 하는 게 예의라 듣기는 했으나 ‘예의’라는 그 말이 어쩐지 거슬려서 화장을 꺼려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도 있었고 단순히 게을러서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서투르기도 해서 화장을 잘하지 않았다. 옷도 그에 맞춰 수수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결혼식과 같은 행사에 가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인형 놀이 하듯 나를 꾸미게 되었다. 그러면 평소 보지 못했던 내 모습에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고래 소리를 내며 놀람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분위기의 변화가 있겠거니 하고 있는데 예상치 못하게 드라마틱한 사람들의 반응을 대면하게 될 때면 외려 내가 더 놀라게 되었다. 그러면서 평소에 대체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다들 이렇게 과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화장을 하는 것도 옷을 맞춰 입기 위해 신경 쓰는 것도 서툴러서 남들보다 배는 더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서툰 데 시간을 들이는 것보다 잘하는 데 시간을 더 투자하자는 생각으로 그 시간을 아끼게 되었다. 그 시간을 아낀다고 그걸 또 훌륭하게 잘 활용하는 것은 아닌데 어쩐지 그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그새 공들여 화장을 하거나 옷을 차려입는 데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멀어졌을 뿐 아니라 어색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얼마 전 공들여 옷을 입고 화장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복장 그대로 수업에 들어갔는데 한 여학생이 아름답다는 말을 해 주었다. ‘아름답다’고 하는데 어쩐지 그녀에게서 곱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만 같았다. 꾸미는 것을 어색해하는 나의 성향과 취향을 세심히 잘 알고 있는 학생이 들려준 말이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PPT에만 공들이던 선생님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셨네요,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을 들은 후 옷은 나를 위해 갖춰 입음도 있지만 상대를 위해 갖춰 입는 것이기도 하니 최소한의 공을 들여는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색과 디자인을 맞추는 것은 나에게는 논문 한 편을 쓰는 것만큼 힘든 일이니 한 번에 다 해결할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을 구비해 두는 데서부터 노력을 해 갈 테지만 어쩌면 그게 전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의 노력도 나로서는 굉장한 발전이다.
낯설고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변신해 가는 내 모습은 때로 나에게도 선물이 될지 모른다. 편한 것이 최고인 나의 미감에만 맞추는 것은 세상의 방식에 맞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니 나로서 이 노력이 세상을 향해 용기를 낸 노크가 되기도 되기 때문이다. 편한 것만 하고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였다. 불편하지만 해야 하는 것 불편을 감수하는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해 보는 것은 어쩌면 나의 벽을 하나씩 깨 가는 과정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가을에는 많은 노력을 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