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쫓기면서 주기적으로 폭발적으로 쓰고 읽기를 반복하게 된 시절이 있었다. 시간을 쪼개 하루를 비워 두고 정신없이 책을 읽고 숨도 쉬지 않고 쓰다 보면 하루가 흘러 있고는 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내뱉기라도 하지 않으면 언젠가 둑이 터지듯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휘몰아치듯 문자를 대면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어느 날엔가는 문자에 치여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문자를 읽어내고 써내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나를 통로 삼아 지나가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많이 쓰고 많이 읽으면 좋다던 말이 적어도 나에게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어쩐지 모를 부족함에 쓰고 또 쓰며 문자를 많이 남기는 게 능사일까 하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한 작품을 구성하는 데는 뼈대가 될 단어와 문장이 있는 한편 살과 피의 역할을 하는 것도 있다. 독자는 뼈대만 읽어 전체 내용만 파악한다 해도 쓰는 입장에서는 전체 구조를 잡아주는 문장 외에도 더해야 할 수밖에 없는 문장이 있다. 그런 문장을 쓸 때는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한다. 쓰는 입장에서도 골격을 보여주는 문장을 만질 때가 속도감도 느껴지고 입체감도 느껴져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는 나로서는 좋다고 쓰는 글이지만 이게 문자를 남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영상이나 그림이 주요 전달 매체가 되었으니 골격만을 추려낸 글도 읽히기가 쉽지 않은 시대라는 생각이 들 때면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작업 전체가 잉여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일이 좋으니 누군가가 보건 안 보건 글을 쓰는 일을 이어갈 수밖에 없을 테지만 글을 쓰면서도 자꾸만 이 작업의 의미를 곱씹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종이책의 의미도 모색해 보게 되었다. 전자책과 웹소설처럼 실물 책이 아닌 네트워크 내의 책이 통용되고 있는 시대에 과연 종이책이라는 매체로 뭔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미래 설계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종이책이 사라져 간다고 해도 종이와 잉크가 만들어내는 그 냄새가 아무래도 좋으니 내가 만들어낸 문자와 잉크와 종이가 조합해 내는 냄새를 세상에 남겨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기 때문이었다.
속도감이 더해지면서 이야기의 전개도 전에 없이 빨라졌다. 시공이 바뀌는 것은 물론 맥락 없이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다반사였다. 소설을 읽고 있는데 게임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에세이를 읽는데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만큼 작가들 또한 고심해서 새 시대의 요구에 맞는 소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때로는 아니 나로서는 자주 느리고 느린 아날로그가 그리워졌다.
이렇게 문자가 넘쳐나는 시대에 나까지 문자의 쓰나미에 나의 문자를 더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게 되면 내 글의 쓸모에 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면 다시 글로 돌아와 턱을 괴고 가만히 내가 남긴 글을 읽어 내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곱씹어 내 글을 읽다 보면 누군가에게는 잉여가 될 문자라 할지라도 머릿속 생각을 문자에 담아내는 일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고 그걸 다시 곱씹으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으니 그것은 여분이나 잉여가 아니라 나에게는 삶 그 자체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론 속에서 왜 이런 고민을 하나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출간 일에 맞춰 한 자 한 자 공들여 읽던 기억이 까마득해져 있는 데서 서글픔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독서를 하는 게 아니라 문자를 속에 집어넣는 것만 같은 뭔지 모를 불편함 속에 책을 손에 쥐게 된 게 원인이었다.
오래간만에 신간을 들고 앉는다. 책에 코를 대고 킁킁대며 잉크 냄새를 맡는다. 잉크와 종이 냄새가 파도처럼 내 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새벽 어시장의 생기가 가슴을 두드린다. 긴장하며 책장을 넘긴다. 내가 잃은 것인지 시대가 잃은 것인지 모를 꾹꾹 정성 들여 눌러쓴 손자국이 가득한 살도 있고 뼈도 있는 책을 보여주기를 바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