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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Z Oct 03. 2023

모자와 칸막이

  마스크에 모자까지 쓰고 있다. 눈 아래를 모조리 가져놓았는데 모자 그늘 때문에 눈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갑갑하다.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내 말을 듣고는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자꾸 얼굴을 살피게 된다. 모자의 짙은 그늘과 마스크가 완벽하게 얼굴을 가려버려 표정을 읽어낼 수 없는 까닭이다. 그렇게 코로나는 한 학기 동안 함께 한 아이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슬픈 시대상을 남겼다. 그리하여 넉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보았는데 이름만 기억하고 얼굴은 알지 못한 채 학기를 마무리하게 된 것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스크와 모자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마스크를 벗으면서 모자를 쓴 학생들도 줄었다. 모자 그늘과 마스크에 가려 있을 때는 다들 화난 것만 같았는데 웃는 얼굴이 제법 보이니 숨통이 트였다. 그러면서 마스크를 쓸 때는 왜 그토록 많은 학생이 모자도 많이 썼던 것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코로나로 의도하지 않은 은거 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가리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로를 경계하고 있던 시대였으니 마스크의 갑갑함을 잘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모자까지 써서 갑갑함을 더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 와 다시 생각해 보니 모자가 갑자기 집 밖으로 나오게 되면서 마주하게 된 세상이 눈부셔서 쳐 둔 차양이 아니었을까 싶다. 단절이 일상이 되면서 저도 모르게 벽을 치게 되고 그게 습관이 되고 그리하여 말문을 트는 것부터가 어려워진 것을 적지 않게 보아 왔기 때문이다. 모자를 눌러쓴 채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필기에만 집중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내가 본 것은 투명 칸막이였다. 아주 간단한 질문조차 건네기를 조심스러워하던 학생들을 보며 책상과 책상 사이의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공기가 그들이 옷깃을 여미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투명 칸막이가 책상 위에만 놓여 있었던 게 아니었다. 질병과 격리에 노출된 사이 전부 저마다의 투명 칸막이를 저도 모르게 가슴에 두르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의 모자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우산이 아니라 소통을 거부하는 방패였다. 질병의 시대가 남긴 슬프고 아린 자화상이었다. 

  모자는 해를 가리기 위해 쓴다. 그것이 방패가 되는 것은 내 곁에 있는 누군가의 온기가 작열하는 태양처럼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빛이 너무 강하면 눈을 뜨지 못하게 되거나 눈을 뜨고 있다고 해도 어둠 속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상태가 된다. 그 순간 필요로 하는 것은 손 그늘이다. 모자를 눌러쓴 채 보이지도 않는 열기를 쳐낼 태세를 갖출 게 아니라 내 옆의 누군가가 실은 내게 손 그늘을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서둘러 되찾았으면 좋겠다. 역병의 시대를 넘어오는 사이 우리도 모르게 우리에게 둘려진 투명한 칸막이가 빨리 사라지면 좋겠다. 

R Magritte_Mature Period_1949_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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