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다쳤는데 혀가 아프다. 혀에서 열이 난다. 너무 뜨거워져서 혀가 얼얼하다. 속이 타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까만 재가 될 때까지 속을 다 태운 뭔가가 분명 있을 텐데 대면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그걸 외면하고 있자니 다시 속이 끓어 올라 어느 시인의 시처럼 다시 돌아다보게 된다. 그리고는 알아챈다. 내 마음을 다치게 한 그 누군가를 향해 나도 날 선 말을 내뱉어 똑같이 상처를 주고 싶은데 자존심 때문에 그걸 하지 못하니 그 언저리를 맴돌게 되고 있었다는 것을.
좀처럼 속이 끓어오르는 일이 잘 없는데 이번 일은 내상이 컸던 모양이다. 연휴 내내 끙끙 몸살을 앓았으니 말이다. 소리 내 속을 토해내며 다시 안 볼 것처럼 싸움이라도 하면 되는데 어쩐지 계속 그 상황을 곱씹고 있게 된다. 그러다 보면 원하는 만큼 뭔가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그런 나를 자꾸만 탓하게 된다. 그럴 일이 아닌데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인데. 다름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알면서도 상황이 되었건, 사람이 되었건 그런 데서 서운함과 분노를 느끼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져서 그 감정에 소진되지 않으려 끙끙거리며 애를 쓰게 된다.
상황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나는 것뿐이라며 나에게만이라도 솔직하게 인정하면 되는데 그 인정이 참 잘 안된다. 이성을 최대한 발동시켜 상황을 도식화해 두고 상처받지 않은 척 쿨하게 굴려고 하는 데서부터 병이 나는 건데 자꾸만 그걸 감추려 든다. 감정을 분출시켜 버리는 게 지는 것 같이 느껴져서 그러지 않기를 버릇화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그로 인해 타인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적어도 그들은 스스로를 기만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그들의 그런 성향을 지향할 수는 없다. 감정이 극으로 치달을수록 참고 곱씹기를 버릇화해 두어서 감정을 폭발시키거나 분출해 버리면 그걸 다시 끝없이 되뇌며 나를 어리석다 탓하게 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속을 곪게 하는 감정을 소화시키려다 병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말이다.
추석 전부터 마음에 걸린 일이 추석이 되어 터져 버렸다. 머리를 들 수 없을 지경으로 지독한 두통과 속 쓰림을 마주하면서 이 병에 응급약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떠올린 게 있었다. 푸딩이었다. 언젠가 일본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먹었던 부드럽고 달콤한 그 맛이 왜 문득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차가움과 달달함이면 불이 난 것 같은 속을 달래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삼킬 수조차 없을 때는 그조차 엄두도 낼 수 없었으나 앓으며 몸을 회복해 놓았으니 오늘 밤은 푸딩을 사서 들어가려고 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난제를 던져주고는 한 인생이 이번에는 전에 없이 어려운 과제를 주는구나 하고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속이 끓어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잘 살아내 보고 싶다는 것일 것이며 푸딩을 찾는 것은 아직은 내게 희망이 남겨져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나만큼이나 속이 부대끼는 그리하여 부글거리고 있을 당신에게도 푸딩을 권해본다. 때로는 낯선 타인이 건네는 먼 위로가 혀의 뜨거움을 식혀줄 수도 있으니 푸딩 한 스푼으로 시름을 덜어내 보기를. 푸딩을 머금고 슬며시 웃으며 괜찮을 거야, 라며 중얼거려 보기를. 그러면 속이 한층 편해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