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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Z Oct 18. 2023

누구에게나 숨겨둔 방이 있다

모두에게 숨겨진 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스물몇 살의 겨울이었다. 치부조차 되지 않는 듯,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히 가족의 사연을 내뱉던 그들은 지쳐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오래 이어져 온 무관심이라는 폭력에 그들은 이미 인이 박여 있었다. 그들은 삼인칭 관찰자가 되어 자신들이 견뎌온 시간을 뱉어냈다. 무덤덤하게 식어버린 눈으로 말을 하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너무 서글퍼 보였다. 오랜 시간 그들을 옥죄고 있던 가시가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느라 그간 애썼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더없이 이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온 듯 보였던 그들에게 차마 남들 앞에 내뱉지 못할 아픈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가정을 만들어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때로는 절망과 아픔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에 둘러싸여 견뎌온, 인내에 지쳐버린 그들의 얼굴을 보며 적정 나이에 이르면 벗어날 수밖에 없고 또 벗어나게 되나, 그 인연에는 영영 영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가족이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게 어쩐지 불현듯 서글프게 느껴졌다. 

그러고 가만 살펴보니 밖으로 토해내지 못한 곪은 사연 하나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저마다의 사정과 사연으로 가슴 한쪽이 다 헐어버렸는데도 그렇지 않은 척, 우리 집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 그 가면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가슴에 묻어둔 사연을 문득 저도 모르게 쏟아내고는 했는데, 어쩐 일인지 나는 고해성사와도 같은 그들의 고백의 순간에 자주 함께하게 되었다. 

그들이 내게 들려준 가족사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사연을 들을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그동안 어떻게 그렇게 태연한 얼굴로 그 긴긴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을까 하는 것이었다. 곪아 터져 헐어버린 상처를 밖으로 내놓지 않는 것을 행복을 가장하는 일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불행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아픔을 끌어안아 속으로 삭이고 있는 것뿐, 그것을 공표하지 않는다 하여 행복한 척 삶을 가장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 속의 아픔이 되어 남겨진 내 근친 거리의 누군가가 다른 이들의 무심한 말속에서 유린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견뎌낸 세월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속이 아렸다. 입이 있음에도 입 밖으로 속을 뱉어낼 수 없게 하는 사연을 품어 안고 나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그들이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살아내는 일이 버거워 퍼질러 앉아 울며 더는 못하겠다는 나를 앞에 두고, 쓰러지지 말라며 그들의 쓰린 사연을 응급 처방 약으로 내 줄 때는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 쓰린 사연 속에서 인고하며 긴 세월 동안 마련해 온 약을 선뜻 내게 건네준 그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사연을 가슴에 품고 있음에도 누구나 남들 앞에서는 꺼내지 못할 사연 하나쯤은 간직하고 사는 게 인생임을 받아들여 온 그들의 세월이 나를 부끄럽게 해서였다. 

두 개의 문이 내 앞에서 열렸다. 내내 잠겨있던 두 문 뒤에 가려진 사연이 생이 찬란하지만 않음을 알려주었다. 누구나 빛만큼의 어둠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 인생임을 알려주었다. 비밀을 듣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함께 짊어주는 일과 같은지 숨겨둔 사연을 듣고 나면 몸살을 앓고는 했는데. 몇 번 심하게 몸살을 앓으면서 가려져 있던 개인사를 듣는 게 겁이 났는데. 치부라 생각하고 평생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으리라 했던 사연을 쓰러져가는 나를 위해 약 삼아 내 준 마음이 마른 가슴에 비를 내리게 하고 있다. 빗속에서 외친다. 더 많이 들어야겠다고. 내 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더 자주 귀를 내주어야겠다고. 

Rene Magritte_Untitled from the portfolio La Philosophie_Volume I_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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