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안부

by GZ

이른 아침 공기가 달다. 계절은 가을을 향해 가고 있고 주변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어간다. 가슴의 옥죔을 느끼면서부터 산을 찾기 시작했다. 삼십 분, 마치 이야기를 나누듯 음악을 들으며 달리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다. 오늘은 비가 오려는 걸까. 산 중턱에 걸린 이른 아침의 구름이 하늘을 땅 가까이 데려다 놓고 있다. 바람과 가사를 읊조리는 목소리와 하늘의 속삭임에 안겨 땅에 발을 내려둔다.

멀리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손짓을 보내온다.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이 시간만큼은 시간의 압박에 쫓기고 싶지 않다. 은행나무 앞. 빗물처럼 떨어져 내려 있는 노란 열매를 멍하니 쳐다본다. 바닥에 이른 노란 결실이 은행나무의 눈물인 것 같아 가슴이 찌르르 저려온다. 노란 열매 옆에 놓인 꽃 무더기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터져 뭉개져 버리고 만 서글픈 낙하가 안타까웠던 걸까. 누군가 꺾어 모아 두고 간 자줏빛 꽃이 촉촉해진 눈가의 눈물을 덜어내준다.

자줏빛 꽃이 시가 되어 가슴에 들어온다. 누가 가져다 놓고 간 것일까. 그리운 이가 부쳐온 편지를 받기라도 한 듯 입가에 미소가 인다. 붉고 푸른 꽃이 볼을 발그스레 달아오르게 한다. 사랑을 손에 쥐여주듯, 앞날을 응원을 전하듯, 아픔을 다독이듯 손을 잡아주는 듯한 꽃에서 온기를 느낀다.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에 대한 습작_베이컨.jpg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에 대한 습작_베이컨

베이컨의 그림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보라색은 아픔이었다. 절규하는 듯한 베이컨의 그림 속 인물이 내 머리에 각인된 보라색의 이미지였다. 보라색은 서늘하고 싸늘했다. 멋스럽지만 그만큼 시린 색이었다. 돌 위에 선물처럼 놓여있는 붉고 파란 천일홍에서 수줍음을 마주한다. 천일홍을 보는데 입에 침이 고인다. 혀로 알사탕을 굴리기고 있기라도 하듯 달달함이 입가에 번진다. 지난날의 다디단 추억이 눈에 아른거린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가슴을 매만지고 간다.

천일홍의 잔상을 담아 나와 차에 이른다. 사랑을 읊조리는 노래 가사가 보라색에는 시린 파란빛만 있는 게 아니라 따뜻한 붉은빛도 있음을 일러준다. 시처럼 물처럼 흐르고 있는 목소리가 눈물로 채우는 게 아니라 행복으로 채워가는 것이 사랑임을 알려온다. 천일홍의 꽃말은 변치 않는 사랑, 영원한 사랑이다. 가을이 안부를 물어온다. 사랑하고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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