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훈련에 민감한 기관이다. 그러하기에 뇌를 단련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한번 단련된 뇌는 이미 익힌 것을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게 된다는 측면에서 꾸준히 뇌를 단련시켜 둘 필요성은 있다. 물론 단련시킨 뇌를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방치해 버리면 그 기능을 상실한 것처럼 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뇌라는 기관은 신기하여 다시금 당시의 단련을 두뇌 속에서 소환하면 그것은 되살아나게 된다.
이것은 기능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물을 보는 방식과 관점과도 관련되어 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른 것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컵에 물이 반만 남았을 경우 ‘반 밖에 없다.’와 ‘반이나 있네.’는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 물이 나에게 필요한지 아닌지까지 생각해 본다면 단지 내 컵에 물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에 따라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 내 인생을 결핍된 것으로 느껴지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사실 물의 양은 물이 필요한 사람에게나 중요한 것이니까 나에게 당장 물이 필요 없는데 내 앞의 물이 얼마나 있느냐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 나아가 사람들이 물에 관한 논쟁을 할 때 컵에 남은 물의 양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논쟁을 왜 하는 것인지를 간파하여 물의 양을 보는 관점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을 기점으로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게 된다. 그러면 세상의 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세상의 시작과 끝이 되는 것은 결과를 내기까지는 죽을힘을 다해 버텨야 한다 해도 역시 멋진 일이 아닐까.
지금까지의 나는 나의 물이 반밖에 없다는 슬픔 속에서 아니, 나는 물조차 없는 컵을 쥐고 있다는 절망 속에서 왜 물의 양 때문에 내가 슬퍼해야 하는지 모른 채 어떻게 하면 물을 컵에 담을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알게 된 것이 있다. 반밖에 없는 물 잔을 받아 든 것이, 그로 인해 어쩐지 억울한 느낌을 느끼게 되어 모든 경쟁에서 주눅 들어 있게 된 것이, 나아가 그 물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지 내가 그 게임을 원하는지 아닌지를 진지하게 따져보지 않은 것이, 그리하여 내가 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 것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깨우침을 통해 이 불평등한 경쟁을 조장한 것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알고 보면 함정투성이지만 모르고 보면 난관으로 가득 차 보이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여 나는 전자의 선택지를 들기로 했다. 어차피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해 보지 않은 것을 끝없이 아쉬워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라면 함정의 구조를 간파하고 나의 방식으로 인생의 미로를 돌파해 나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야 나의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내가 지나온 곳이 길이 되어 남아있을 것이고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니까 나만의 독보적인 길이 될 것이다.
이게 우물 속에 갇혀 살아온 길과 살아갈 길을 요리조리 따져 본 끝에 한 달 동안 내가 내린 결론이다. 뇌 또한 미로처럼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으니까 나의 뇌를 조금 더 내가 놀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것 그래서 행복하고 가슴 설레는 많은 추억을 나의 방식으로 남겨가는 것, 그게 지금은 내가 나의 뇌에 내린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