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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Dec 24. 2022

멋쟁이

20221109


몇년전, 친한 언니 결혼식 참석을 위해 이태원에 갈 일이 있었다. 언니는 그날 내가 부케를 받아주길 부탁했다. 특별하게 차려입고 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 장소가 이태원이라고 하니 내 마음대로 조금은 재미있게 입어도 되지 않을까. 2016년도에 발매된 H&M과 KENZO의 콜라보레이션 컬렉션이었던 옷들이 생각났다. 패션에 대해 어느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억할 수도 있겠다. 저가형 SPA 브랜드인 H&M이 명품 브랜드와의 협업을 시작했던건 패션계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패스트패션과 하이엔드의 만남이란! 성공은 당연했고, 이후 다른 브랜드에서도 너도 나도 따라서 협업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제품들은 비교적 소량씩 한정 발매이기 때문에, 운동화처럼 리셀러 문화가 성행하기도 했지. 지금은 이 인기가 예전같진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요가 있기는 해서, H&M은 아직도 꾸준히 시즌마다 콜라보 제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걸 누가 사냐고?



역대 콜라보 제품 중에서도 2016년 당시의 KENZO는 특히나 출시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화려한 프린트와 강렬한 색감에 비해 웨어러블한 디자인. 이전의 다소 보수적이었던 사회적 분위기에서 시대가 지나며 각자의 개성이 중시되기 시작하는 과도기적 시기에, 자신의 취향을 한껏 표현할수 있으면서도 너무 난해하지는 않은, 그 복합적인 니즈를 적절히 잘 풀어냈다고 보여지는 컬렉션이었고, 피스 하나하나 모두 소장 가치가 충분하면서도 동시에 일상적으로 실착도 가능한 그런 똑똑한 디자인들이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 글로벌 브랜드는 전세계 주요 매장에 협업 제품을 동시 발매했는데, 특히 한국의 패션 오덕들은 열광했다. 내 기억으로는, 발매 전날부터 매장 앞에 줄을 선 진풍경이 뉴스에까지 방영되기도 했던것 같다.



나는 서울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에서 광클로 구매에 성공했다. 일찍이 품절된 상품은 리스톡(수량 한정이기 때문에 엄연히 재입고라고 보긴 힘들다. 누군가가 구매 후 반품한 상품이라고 봐야 맞다.)을 기다렸다가 운좋게 득템. 이 경우는 광클보다 존버. 그리고 서울에 있는 매장에 전화해 특정 제품의 재고가 있는것을 확인은 했지만 직접 갈 처지가 못되는 나를 위해 마침 그날 서울에 있던 친구 녀석이 대신 구해다 준 제품도 있었다. 한국에 물량이 아예 안풀려 직구한 것도 있었고. 매 협업 컬렉션마다 이렇게 덕질을 한 것은 아니고, 내 취향 색이 짙었던 겐조와 모스키노때 정도만.


지금이야 내가 기껏 해봐야 편의점 일을 하고 있고 먹여 살릴 입도 많은데다 살도 찌고 나이도 먹으니 꾸미는데에 많이 게을러지긴 했지만, 패션이야말로 나에게 어쩌면 음악보다도 더 큰 열정을 이끄는 것이었기에 '그런걸 도대체 누가 입어'의 '누가'는, 바로 나샛기였다.



그렇게 수집한 옷 중에 하나를 그 결혼식을 위해 선택한거였다. 원피스였는데, 사실 '원피스'라기보다는 '드레스'에 가까운 디자인이기도 했다. [매직아이] 패턴이 연상되는 기하학적인 프린트가 보색대비 컬러들로 뒤덮인 실크 원단에 요정 날개같은 어깨 라인의 쉐잎. 가까이서 보면 퀼팅과 레이스 라이닝 같은 작은 디테일도 살아있는 그런 옷이었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 날을 위해 사둔 옷인것만 같았다.



결혼식날 오전, 칼퇴를 하고 급히 KTX를 타러 천안아산역으로 갔다. 갈길이 멀어 마음이 꽤나 급했었는지 열차시간보다 다소 일찍 도착했다. 역내의 카페에서 따듯한 라떼를 한잔 사서 역 앞 광장의 흡연구역으로 향했다. 복장이 화려하다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는 했었다. 담배불을 붙이고 있는데 저 멀리 뒤쪽에서 남자 둘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쪽바리다, 쪽바리. 아리가또! 하이! 하이!"



"아니면 어떡할라고 그래ㅋㅋㅋ 못알아듣는것 같긴 하넼ㅋㅋ"



"일본년 맞다니까ㅋㅋㅋㅋ 옷 입은 꼬라지 보면 모르냐ㅋㅋㅋ"




나의 그 열정과 쏟은 시간과 피같은 돈으로 힘들게 구해서 소중한 사람의 특별한 날을 위해 야심차게 고른 옷을 드디어 개시한 첫날에 저런 소리나 들을 줄이야. 이런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화가 나는것보다도 너무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몰랐다. 반응을 안하자니 정말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 사람인줄 알고 계속 개소리를 지껄일테고, 무언가 반응을 하자니 그 사람들의 소리를 들은 광장의 다른 모두가 이미 나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주눅이 들었다. 나는 내가 가진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있었지만, 동시에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내가 정말 일본사람이었대도 이런 취급을 받을 만한 상황인가. 대한민국 땅에서 동종 한국인에게 인종차별을 당하다니. 짧은 순간이었지만 편견과 차별에 대해 깊은 혐오감이 밀려와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이런 기분인거구나. 결국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이어폰을 뚫고도 비아냥거림이 들렸고, 날카로운 시선들이 한동안 느껴졌다.



그러다 저쪽에서 걸어오신 할아버지 한분이 내 앞에 섰다.



"아가씨, 불 좀 빌릴 수 있을까?"



주머니를 뒤져 두 손으로 라이터를 드렸다. 기분이 많이 상해있는 상태라 조금은 경직되어 동작마저 어색해 보였을것 같다. 할아버지는 불을 붙이신 후 라이터를 돌려주시며,



"멋쟁이 아가씨, 저 사람들 말 신경쓰지마. 내 눈엔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아가씨가 제일 멋져."



할아버지의 말씀에 꾹꾹 누르고 있던 눈물이 쏟아질것만 같았지만, 침 한번 꿀꺽 삼키니 괜찮아졌다. 그분의 눈을 마주치고 나니까 나도 따라서 미소가 지어졌다.



"감사합니다."



그날 가장 멋진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였다. 그 말씀을 해드렸다면 참 좋았을걸.



나는 아직도 좋아하는 옷을 입고 나가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관종이긴 하지만, 비판이 아닌 '비난'은 관심의 범주가 아니다. 설마 그딴걸 돈주고 샀다고?, 그런걸 만들어 파는 사람도, 사는 너도 이해할 수가 없네, 니가 만든것 아니고?, 당연히 같이 다니기 창피하지, 야 앞에 쟤 옷 입은 것좀 봐, 튀고 싶어 환장을 했네, 머리색 좀 남들처럼 하고 다닐 수는 없겠냐, 그 피어싱도 문신도 좀 가리고, 남자들은 너같은 스타일 제일 싫어하는 거 알지?, 내가 어디가서 니 얘기를 못해, ... 이런 말 살면서 많이 들어봤다.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우와 그거 어디서 사셨어요?, 이 언니 진짜 매력있네, 혹시 옷장사 하세요?, 너는 너만의 스타일이 있어서 그게 참 부러워, 님 꼭 일본 스트릿 잡지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 같음, 헐 보라색 립스틱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 처음 봤어요, 오늘 스타일링 완전 굿, 역시 너는 소화 못하는게 없네, 뭐야 아이템만 따로 놓고 보면 그냥 촌스러운데 니가 걸치니까 갑자기 간지템이야, ... 이런 말도 들었다. 같은 옷인데 이렇게 다른 반응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극단적으로 다른 반응들에 정체성의 혼란이 올 때가 많았다. 남들 시선 신경 안쓰는 성격이야 어떤 피드백에도 무던하겠지만, 나는 매사에 예민한 사람이다. 칭찬을 들으면 으쓱해지다가도, 수근대는 소리에는 금새 위축되고.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다. 보여지는게 일인 연예인같은 직업군은 오죽할까.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시라. 본인이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도 굳이 이런말들을 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 취향을 바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그리고 그런말을 한 님들의 스타일이랄것도 없는 그 스타일이 존나 구리다는걸 나는 생각만 했지 한번도 입밖으로 낸 적 없었다. 그게 당연한 배려고 예의니까.


할아버지의 말씀이 상처입은 나를 위한 빈말이었대도, 적어도 나는 존중받았다. 나는 그날 입은 그 옷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고, 누가 뭐래도 가장 아끼는 옷이다.



결혼식에서 받은 부케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 다시 역에 도착해 아까와 같은 자리에서 담배를 꺼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행위를 하고있는 중이었지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기분이었다. 나도 남의 비난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용기내 그런 말을 해 줄 수 있는 내면까지 멋쟁이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담배가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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