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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Mar 15. 2023

Good Girl

20230315

학생 주임을 맡은 선생은 전투력이 상당한, 어느 학교에나 꼭 한 명씩은 있었을 법 한 말 그대로의 ‘미친개’ 포지션이었고 본인의 그런 역할에 상당히 자아도취 돼 보이는 사람이었다. 늘 들고 다니는 [정신봉]이라 쓰여 있는 목각을 위해 직접 나무를 골라 목공소에서 따로 주문 제작까지 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렇게 깎아온 게 집에 열댓 개는 더 있으며, 차에도 항상 스페어가 있어서 그렇게 손에 익은 자신만의 무기 이외의 맴매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누가 들으면 시발 전설의 사무라이라도 되는 줄. 그걸 ‘정신봉’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것도 킬포. 나름대로는 ‘생각 의자’나 ‘진실의 방’ 같은, 뭐 그런 맥락인 듯.

또 헬스를 꾸준히 해서 근육량이 상당하다는 썰도 있었는데, 그렇게 몸을 키우는 목적은 언제든지 학생들을 구타할 수 있도록 지치지 않는 체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렇다. 이 새낀 이거에 정말 진심인 새끼였고, 당시엔 교사의 폭언과 폭행이 아주 대놓고도 허용되던 때였다. 그래서 졸업 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선생이 학생의 털끝 하나라도 잘못 건드렸다가는 아주 좆되는 수가 있는, 학생이 선생의 폭력을 신고할 수 있게 된, 학부모가 갑이고 선생은 을인 이런 시대가 왔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걱정까지 될 정도였다. 단지 체벌만을 위해서 선생질을 하는 사람 같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모든 자존감을 잃고 빠른 은퇴를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지금 생각해도 나는 참 착한 학생이었다. 여기서의 ‘착함’이란 도덕적인 의미보다는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눈 밖에 나는 행동 없이 말 잘 듣는 ‘다루기 참 수월’한 학생. 사실 내 입장에서는 그냥 무기력한 거에 가까웠지만. 해서 안 때려본 학생이 없는 정신봉조차도 언터쳐블이었던 학생이 있다면 그게 나였다. 고등학교 1학년을 보내는 일 년 동안 내가 학주에게 단 한 번도 맞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친구들은 내가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한 대단한 기록이라도 세운 것 처럼 놀라워하기까지 했었다.


그랬던 나도 야자(야간 자율 학습 시간)를 튀어 본 적이 학창 시절 통틀어 딱 한 번은 있었다. 이것도 정확히 말하자면 튄 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튕겨 나온 게 맞겠다. 하루는 반 애들이 다 같이 야자를 째자며 분위기를 선동한 날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왠지 서로 죄책감도 덜하고 전체 다수가 교실을 비워 버리면 담임이 황당해서라도 안 혼낼 것 같았나 보다. 전례가 없던 사건이라서 다음 날 담임은 정말로 반 전체를 상대로 체벌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냥 쿨하게 웃어 넘어갔을 만큼, 담임도 좀 독특한 사람이긴 했다. 기억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급식을 먹을 때 밥과 반찬과 국 따위를 번갈아 골고루 먹는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식판에 담아온 메뉴 중 딱 한 놈만 패고 하나를 다 조지면 그다음 반찬으로 넘어가는, 밥도 같은 방식으로 밥 칸이 빌 때까지는 오직 맨밥만 퍼먹는, 거참 설명하기도 어려운 기상천외한 방식의 식습관을 가진 도른자였다는 것. 그 짠 오징어 젓갈도 예외는 없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똑같이 균형잡힌 영양 섭취를 한 게 아니냐는 그 양반의 주장이 묘하게 설득력 있었네. 하여간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이쪽도 정상은 아님.


공부를 잘했던 모범생 녀석들까지 의외로 일탈에 적극적이었다. 애들이 모두 가방을 챙기며 튈 준비하는 동안 나는 가만히 서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게 뭔 자유를 갈망한 쿠데타도 아니고.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은 우리 반 친구 한 명도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신이 난 와중에도 우리 둘에게 이게 도대체 왜 고민이냐는 듯 얘기했다. 니네가 남으면 결국 니네 때문에 다른 애들은 다 혼날 거라는 둥, 존나 청렴 결백한 씹선비님 나셨다는 둥, 배신자라는 둥.

내가 그 흔한 월담이나 땡땡이 한 번 쳐 본 적이 없던 건 그게 해서는 안 될 나쁜 일이어서라기보단 그 시간에 학교가 아니면 딱히 있을 곳이 없어서였다. 10시까지 꼼짝없이 학교에 갇혀서 공부나 하건, 아니면 책은 예의상 펴 놓기만 하고 이어폰으로 팝송을 들으며 노트에 그림이나 그리건, 어쨌거나 학교에 있는 게 나았다. 때 되면 밥도 주고 혼자 있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좋았다.

뻔한 PC방도 노래방도 별 흥미가 없던 핵노잼인 나는 그렇게 이른 시간에 집에 가봐야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집안일 말고는 할 것도 없었지만 텅 빈 교실에 혼자 남는 건 그거대로 무서울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짐을 쌌다. 막상 할 것도 갈 곳도 없어서 집 반대 방향으로 좀 걷다가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 물고 괜시리 멀리 빙 돌아서 결국엔 해 지기 전에 집으로 갔다.


다음 날이 돼서야 알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쳤던 그 친구는 결국 혼자 꿋꿋이 남아있던 모양이더라. 추측으로는 아마도 서로 비슷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을 텐데, 그날 함께 남아 주지 않았던 게 이제 와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그 일 때문에 녀석은 졸업할 때까지도 은근한 따돌림을 당했고, 공부를 열심히는 했지만 그리 잘 하지는 않았던 탓에 3수를 하고도 결국엔 원하는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에 들어갔다고 건너 들었다. 내가 ‘방관자’였던 적은 없었나 되짚어 보다가, 한 가닥의 잔머리도 용납하지 않는 강박에 수많은 핀을 꽂고 다녔던 그 친구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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