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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Mar 22. 2023

데스노트

20230322


인간의 뇌가 어떤 식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알면 알수록 신기하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일들도 그때의 일을 기억해보려 시도하면 슬금슬금 되살아난다. 최면도 이런 원리려나. 내 기억 속에서 스무 살 이전의 나는 흑백이었고 대학에 입학함과 동시에, 그러니까 내 의지로 모든 걸 선택하고 책임지게 되면서부터야 색깔이 입혀졌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실은 그 시기에 이미 완성된 몸으로 태어난 거고, 그 전의 과정은 그저 전생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 ‘통속의 뇌’인 걸까.

[더 글로리] 과몰입 이후로 기억 중추가 자극되어 마치 전생과도 같던 그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다시 떠올릴 일도 없어 더 나이가 들면 정말 삭제될지도 모르는 기억들이기에, 그렇게 되기 전에 기록해보려고 노트북을 켰다. 오늘도 고3 때의 이야기.


우리 반은 좀 특이한 반이었다. 3학년으로 진학하며 각자가 정한 선택과목에 따라 반이 나뉘어졌다고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성적 격차가 유독 심한 편이었다. 우리 반엔 공부를 잘하는 과학/심화반 학생도 많았고, 그만큼 성적이 바닥인 학생도 많았다. 뭐가 중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교권 석차인 녀석들이 한 반에 아무리 많다고 해도 반 평균 점수는 그럭저럭 평범한 수준. 담임은 이런 부분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다. 당시의 담임은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어렸었으니 이런 반을 관리하기가 꽤 어렵긴 했을 거다. 그리고 그런 극단적인 성적 분포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중간계 그 어디쯤, 내가 있었다.


공부만 하는 놈들과 공부 빼고는 다하는 놈들이 한 교실에 모여있으면 모 아니면 도다. 잘하는 애들이 못하는 애들을 이끌어 주거나, 못하는 애들이 전체의 분위기를 흐려 놓거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모가 아니라 도였다. 반장은 공부는 잘했지만 너무 착하고 순한 애였다. 야간 자습 시간에 떠들거나 도망가는 애들을 통제하기엔 마음이 참 약한 친구였다. 카리스마와 리더쉽이 부족해 담임에게 혼나고 와서 우는 것도 몇 번 본 것 같다. 글의 흐름에 그다지 중요하진 않겠지만 참고로 담임은 여자고 반장은 남자였다. 담임은 반장을 좀 답답해했었다. 내가 볼 땐 걔가 반을 대표할 역량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둘이 성격이 존나 안 맞는 거였음. 애는 죄가 없다.

하여간 상황이 그러하니 담임은 갑자기 새로운 제안을 한다. 야간 자습 시간에 튀거나 떠든 놈들을 실시간으로 칠판에 적고, 그 명단을 메모해 다음 날 본인의 출근 때에 맞춰 교무실로 가져오기. 그리고 그 임무를, 걸린 누구든 눈감아줄 맘씨 고운 반장도 아니고, 누구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부반장도 아닌, 제3자에게 맡기게 되는데...



쌩뚱맞게도 그게 바로 나였다. 담임이 영악한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뭣도 아닌 내가 갑자기 뜬금없이 그런 일을 맡게 된 것에 대해 반 친구들은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나는 이유를 알았다. 나는 그때도 거짓말은 못 하는 성격이었고, 공평하고 공정한 것을 좋아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였다. 이전에 쓴 글에서처럼 나는 야자를 튈 리도 없는 애였고,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학칙을 위반하면 망설임 없이 적을 수 있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나, 3학년 때 반에서 왕따였잖아? 반에는 친한 친구가 애초에 없었다. 담임이 생각했을 때 다른 학생이 아닌 내가 그 일을 맡는다면, 다음 날이 껄끄러울까 봐 눈치 보며 못 적을 이름도 없었고, 명단에 적힌 누군가가 나를 밉게 볼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이 역할이 아니라도 어차피 나는 미움받는 처지니까 혹시 모를 뒷일에 신경쓰지 않아도 됐겠지. 그렇다고 내가 누구를 부당하게 적어 낼 애도 아니었으니까. 고작 그 정도의 당번 따위를 ‘너뭐돼’는 권력인 듯 착각한 적도 없었다. 저 사람은 모든 걸 다 파악하고서 빌어먹을 포켓몬처럼 나로 정한 거였다.


그래. 절대로 몰랐을 리가 없다. 아주 적재적소에 적임자를 꽂아 놓고 야물딱지게 써먹을 줄 아는 어~마어마한 썅년. 담임의 담당 과목은 수학이었는데, 이렇게 딱 떨어지는 x값을 찾고서 본인은 얼마나 속이 편했을까. 그 덕에 나는 친구들과의 관계 회복에 가능성조차 없어졌고, 애들은 내가 적는 명단을 데스노트라고 불렀다. 이름이 적힌 녀석들은 예외 없이 다음 날 아침 복도에 엎드려 매를 맞았다. 사실대로 이름을 적는 게 내겐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만, 내가 적은 이름들이 매일 아침 매를 맞는 소리를 듣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시 면접을 갈 수 있도록 결석을 허락해 줬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그 지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텐데. 교사 실적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대학을 반대하면서, 선생 해 보니까 나쁘지 않으니 학교 선생으로 진로를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는 게 기가 막힌다. 배울 것이 정말 수학 말고는 없는 ‘가르치는 자’로부터의 진실성 없는 본인 직업 추천은 한 번쯤 솔깃해 볼 가치도 없었다. 제자의 현실과 미래에는 코빼기도 관심없던 이기적인 사람.


그때 나이의 두 배가 된 지금의 나는 오늘도 또 이렇게 오래전 흘러간 누구에 대한 욕이나 쓰고 있으니, 내 에세이야말로 [데스노트]렸다. 그리고 아마도 여전하실 당신은 방금 여기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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