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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맛이 느껴지는 나이가, 됐네.

손 끝으로 여는 작은 세상

by 임그린


한 때 정말 드라마에 미쳐있을 때가 있었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일 동안 잠도 몇 시간 자지 않고 울기도 웃기도 하며 오로지 그 드라마의 상황 속에 빠져 보던 때. 다 보고 나서도 한동안 감동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대본을 구해 다시 읽으며 생각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드라마 작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휘어잡아 몰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그런 드라마를 쓰는 꿈을.

지금도 드라마(미국 드라마건 한국 드라마건)를 보는 건 주말에 즐겨하는 취미 중 하나지만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열정(?)이 줄어드는 걸 느낀다. 그렇게 며칠 밤을 새우며 몰두하다 보면 피곤하기도 하고. 다음날 출근도 해야 하고. 또 쉬는 날이 오기 전까지 며칠 동안은 살아가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하니까.

그래도 가끔, 아주 환한 햇살이 눈을 두드려 깨우는 상쾌한 주말 아침이나 어둑어둑 아침이 오지 않을 것처럼 칙칙한 주말 아침에 드라마의 맛(?)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한동안 나를 휘어잡았던 드라마를 다시 몰아본다거나 사람들이 열광하는 드라마를 기웃거려본다.

이번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작가 노희경 선생님의 작품을 뒤적거리다가 '고독'을 다시 보게 됐다.

'KBS 드라마 고독'은 2002년에 방영됐던 20부작 월화 미니시리즈이다. 절절한 사랑 얘기에 눈물을 흘리며 보던 기억은 있지만 그냥 그렇게 다른 작품들처럼 흐르는 세월에 잊고 살았다.

화창한 날이 아니라 그랬는지 유독 그 드라마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처음 고독을 보았을 때 그 드라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드라마가 그렇듯 사람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이십 대의 청년과 사십 대의 여자가 만나 가슴 절절한 사랑을 해 나가며 세상과 부딪히고 사람들과 갈등하는 그런 이야기.

그래서 나는 그때 영우(26세의 청년)의 눈빛과 대사에 매료돼 눈물을 흘렸다. 모두가 반대하는, 나이가 많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의 밝은 에너지 빛이 흔들리는 게 마음 아파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에게도, 하나뿐인 형에게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그리고 그 여자에게도. 그가 만나는 세상 모두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홀로 싸워야 하는 그의 마음이 안쓰러워서 눈물을 흘렸다. 그 아픔이 내 마음에 꽂혀서 눈물이 났다.

그런데, 내 이십 대를 다 떠나보낸 후 다시 본 고독은, 그냥 그대로 슬픔이었다. 이렇게 아프다, 정도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나는. 그렇게 우는 것도, 아프다고 쓰는 것도 가슴이 아픈... 슬픔 그 자체였다.

다시 본 '고독'에서 나는, 경민(40대 중년 여성)의 마음이 와 닿아 눈물을 흘렸다. 내 이십 대 그 당시에 느끼지 못했던 그 여자의 마음이 보였다.

자기같이 젊은 사람들도 나처럼 사는 게 이렇게 힘드니? 묻고 싶다 정말...

이라고 말하던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여자. 진정한 고독(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는 여자. 사람이 곁에 있어도 외롭고 아무도 없어도 외롭고 목숨과도 같은 자식이 있어도 외로운 여자.

겉으로 보기에 경민은, 성공한 멋진 중년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그냥 여자이다, 사랑에 울고 사랑에 웃는. 강한 것처럼 보이는 엄마이지만 가장 여리고 작은 어깨를 가진 여자. 당시엔 그 여자의 아픔보다 영우의 영혼에 끌려 울었는데... 내 삼십 대에는 그 여자의 외로움과 아픔, 그 쓸쓸함이 자꾸만 마음에 닿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영우의 슬픈 눈빛보다, 경민의 텅 빈 눈빛이 저릿저릿 스며들어 한참을 울었다. 드라마가 끝이 난 후에도...

기획의도에는 이렇게 나와 있었다.

젊은 시청자에겐 사랑의 순수성과 숭고함에 대해, 나이 든 시청자에겐 고독한 인생을 위로받는 드라마를 선보인다.

외롭다고 말할 줄은 알았지만
그 외로움이 너무 진해져서 고독이 되네.
쓰리게 쓴 고독이 됐네.

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다니.

내가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다니.

이런 맛이 느껴지는 나이가, 됐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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