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끝으로 여는 작은 세상
'사랑 그리고 그리움'을 주제로 하는 사진 전시회를 보고 왔다. 보러가야지 결심했던 건 아닌데 지나는 길에 사진전을 한다는 홍보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게다가 주제가 '사랑 그리고 그리움'이라니. 마음 설레지 않은가.
막상 전시회장에 가보니 사진이나 그림을 볼 줄 아는 눈이 없어서 그런지 어떤 작품은 이해할 만도 하고. 또 어떤 작품은 고개를 갸웃 거려봐도 뭘 의미하나 알 수가 없어 그저 신기하다, 예쁘네 정도만 하고 발을 떼기도 했다.
전시회장을 다 둘러보고 난 후 뒤늦게 손에 들린 초대장을 읽었다. "감동스러운 시간.. 감동을 말과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낀 소중한 시간들을 작품 안에 담아.." 라고 적힌 그 구절을 읽고서야, '아' 했다. 문학을 하고 싶다는 사람이, 그걸 뭘 이해하려고 했냐. 한심하기도 했고 웃음도 났다. 누구에게나 그들만의 '어떤 이야기'가 있기 마련인데. 그들 세상에서 느낀 그 찰나를 '말과 글'로 담을 수 없어 찍은 거라는데... 그걸 굳이 머리로 따져 이해하려고 했으니 닿지 않는 게 당연하지.
그래서 나도 생각해 본다. 나는 글을 쓰고픈 사람이니까, 나만의 '어떤 이야기'가 있으면 '글'로 풀어내야 하는 거다.
그래, 내게도 있다.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앞뒤가 전부 흐릿하지만 그 속에 있는 그 순간만은 또렷하게 남아 가끔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 켠을 찡하게 하는 그런 어떤 이야기.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그게 뭐야, 할 수도 있지만 내겐 너무 가슴 아파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던 이야기. 한 번쯤은 들려주고 싶었지만 차마 꺼내 보일 수 없던 이야기. 오늘은, 그 얘길 잠깐 해야겠다...
*
버스에서 내려 터덜거리며 걷고 있었다. 어둠이 뚝 떨어져 내린 길, 가로등 불빛과 요란한 간판의 네온사인 불빛 사이로 걸었다. 하늘을 보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가슴이 먹먹한 날이었다. 여기가 어디쯤이더라, 고개를 들었다.
개... 개가 있었다. 특이한 점도 없었고, 그냥 동네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커다랗고 더러운 개 말이다. 눈이 마주쳤지만 개도, 그녀도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고개를 돌려 걸었다. 붉은 빛 신호등 앞에 섰다. 슬며시 뒤를 보니, 그 개가 여전히 곁에 있었다. 다시 개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는 몰랐는데 슬퍼 보인다. 똥개 주제에....
연한 초록빛에 발을 내디딘다. 똥개 주제에 슬픈 눈을 가진 녀석은, 계속 그녀의 뒤를 밟는다. 이제 그녀도, 신경이 쓰인다. 자꾸만 힐끗 거린다. 안되겠다. 걸음을 멈춘다. 개도 그 자리에 선다. 그녀가 빨리 걷는다. 개도 빠르게 따라온다. 멈춘다, 선다. 달리면, 뛴다. stop.
야, 너 뭐냐...
.....
배가, 고픈가. 동네 똥개니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거구. 그래, 내가 사람이 좋아 보이지? 짜식, 인심 썼다. 기다려봐, 잠깐. 작은 구멍가게에 들어간다.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아저씨가 드르륵 문소리에 묻지도 않은 침을 닦는다. 예, 어서 오쇼. 다섯 걸음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가게를 고개로만 휙 둘러보고 초코파이 하나 집어 든다. 이거..... 그거? 겨우 그거 하나에 잠을 깨웠냐, 눈초리로 보더니 잠긴 목소리로 던진다. 오백 원. 여기..... 점퍼 주머니 여기저기 뒤적거려 동전을 꺼내 던지듯 내어놓고 가게를 나선다. 개는 꼭 기다린 것처럼 그녀를 보고 앉아있다. 탁, 등 뒤로 문이 닫히고 그녀는 한숨을 내쉰다. 눅눅해져서 잘 뜯어지지도 않는 봉지를 힘으로 확 잡아 찢어버리고 초코파이를 내민다. 개, 더럽고 배도 고픈 듯 보이는 동네 똥개는, 냄새조차 맡지 않는다. 그냥 그녀가 하는 모양을 보고만 있다. 뭐야, 이거 먹으라구우... 너무 커서 그런가. 그녀는 초코파이를 반으로 쪼갠다. 주욱 늘어나는 바람에 우두두두 초코덩이들이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들고 있어 그러나 싶어 동네 똥개 발 앞에 내려놓는다. 가까이 있어 그러나 싶어 슬쩍 뒤로 물러나본다. 쳐다봐 그러나 싶어 고개도 돌려본다.
개는, 그 자리 그대로 그녀만 보고 있다.
....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갑자기 혼란스럽다. 동네 똥개의 까만 눈이 너무 슬퍼 보인다. 눈물이 그득한 것, 같기도 하다. 뭐야, 안 먹으면 나, 간다? 초코파이를 땅에 내던지고 괜히 헛기침을 하며 손을 털어낸다. 한참을 걸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고개만 슬쩍 돌렸다. 더럽고 불쌍해 보이는 동네 똥개는, 여전히 따라오고 있다! 멈추어 선다. 돌아선다.
야, 너 집에 안가냐? 보아하니 집도 없게 생겼네. 따라오지 마, 우리 집 안돼.... 귀찮아... 가버려!
....
개의 까만 눈이 꼭, 알아들은 것처럼 흔들린다고 보여 진 건 착각이었을까. 괜히 울컥 해진다. 암튼, 나 갈 거니까, 따라 오지마! 조금 큰 목소리로 경고하고는 다시 걷는다. 조금 빨리 걷는다. 저 모퉁이만 돌면 골목길이다. 멈춘다. 돌아보면, 역시 따라오던 개가 멈추어 선다. 이제 살짝 난감해진다. 길 건너로 보이는 편의점으로 뛴다. 개도 뛴다. 하지만 편의점에는 그녀만이 들어선다. 그녀는 아까 가게와 달리 넓은 편의점 안 구석구석 발로 구경한다. 온 몸의 신경은 밖으로 쏠려 있으면서. 그저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음료수 가득 담긴 냉장고 문도 한 번 열어보고, 삼각 김밥 하나에 하나 더, 찬스 붙은 진열대에서 서성이기도 해 보고. 계산대 위쪽으로 달려있는 TV를 보며 연신 흐흐 웃음을 흘려대는 주인아저씨가 흘끗 쳐다볼 때까지 돌아다니다가 대일밴드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에 선다. 삑, 계산을 하고 나서 잠시 망설인다. 족히 10분도 넘는 시간이었다.
그 자리 그대로, 개가 있었다. 복잡한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개를 본다. 개의 눈은, 더욱더 슬프다. 어둠이 더 내려앉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가만 보다가 냅다 뛴다. 골목이 보인다. 모퉁이를 재빨리 돌아 골목으로 들어간다. 하아하아...
...가, 버렸다. 사라져 버렸다. 코끝이 찡하다. 가슴 한 구석이 괜히 짜아 해지는 것도 같다. 휑했다. 손에서 대일밴드가 툭 떨어졌다. 흐음, 목이 잠겨 헛기침을 해 본다. 찡한 기운이 코끝에서 눈 앞으로 옮겨온다. 까만 밤하늘이 뿌옇게 탁해진다.
어디로 간 걸까.
왜 따라온 걸까.
어떻게 됐을까.
밥은 먹었으려나.
정말 슬펐나.
나를 아는 건가.
왜 계속 따라오지 않았을까.
내가 밀어낸 걸까...
대문 앞에서 그녀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본다. 더럽고 뿌연 주황 빛이 그녀의 얼굴을 때린다. 간지럽다. 눈알이 간지러워 꿈벅인다. 그래도 간지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아... 툭, 하고 결국 눈에서부터 뭐가 떨어진다.
*
잊을 수 없는 이 기억... 한참을 가지고만 있던 기억이다. 그동안 담아만 둔 건 미안함 때문이었다.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뭐하나 딱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지만 내가 잘못한 것만 같아서. 뭔가 해 줄 수 있었던 게 있을 것 같아서. 해주어야 했던 것만 같아서. 그렇게 꿈인가 싶을 만큼 금방 사라져 버린 게 정말 차가운 내 마지막 말 때문인 거 같아서... 그래서 앞으로도 잊지 않을 기억, 잊지 말아 주어야 할 기억.
한번 생각해 보라. 당신에게도 당신에게만 오직 의미있는 '어떤 기억'의 조각들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