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계획하면, 신은 웃는다

Delhi Branch & Donald Dungan OC Library

by 도럽맘


인간이 계획하면, 신은 웃는다.
man plans, and God laughs

유대 격언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가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도 인생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모든 것이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는 겸손한 깨달음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속담으로 말하자면 ‘세웅지마‘ 와 비슷한 의미이다.


며칠 전, 인스타그램으로 DM이 왔다. 인스타를 통해 알게 된 또 다른 ‘도럽맘’이었고, 그곳에서 인연이 닿아 커피챗도 하며 교제를 이어가는 아이 둘의 엄마다.


DM의 내용은 Santa Ana에 막 새로 생긴 어린이 도서관의 릴스였다. 작은 브랜치 도서관이지만, 모던한 인테리어와 작은 놀이 공간, 그리고 공원이 있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이런 데는 또 가봐야지’ 하는 마음에 지도를 검색해 저장해 두었다.


언제 가볼까 고민하다가, 곧 다가오는 토요일에 가보기로 했다. 마침 나의 전도로(?) 요즘 도서관을 자주 다니는 학교 친구 엄마와도 함께 방문하기로 했다.


사실 그날은 내 마흔한 번째 생일이었다. 오전엔 딱히 일정이 없었고, 남편은 회사 이사 문제로 주말까지도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라 저녁에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새로운 도서관은 또 어떠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줄지 기대가 되었고 아이와 새 도서관과 푸른 공원에서 행복할 시간을 보낼 생각에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날은 아이와 함께 도서관 탐험과 공원 나들이 그리고 바닷가 방문까지 하는 완벽한 하루를 보내겠다는 결의를 보이며 모든 스케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토요일 아침.

밖을 내다보니 회색빛 구름이 가득 끼고, 공기도 제법 쌀쌀했다. 한동안 아침부터 화창하고 덥기만 하더니,

오늘부터 기온이 내려간다는 뉴스를 보고 나니 괜히 마음이 심란해졌다.


‘생각보다 추울지도 모르겠는데… 바닷가까지 가는 건 무리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린다.


“오늘은 그냥 가까운 공원만 들르자.”

해변에 갈 준비는 생략한 채, 가볍게 가방 하나만 챙겨 집을 나섰다.


이때는 몰랐다. 오늘 하루가 전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걸...


오늘도 완벽한 도서관 탐험이 될 거리는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Delhi Branch Library

산타아나 혹은 애너하임 방향으로 도서관을 갈 땐 우리는 맥도날드가 아닌 ‘파넬라(Panera)’라는 베이글 전문 카페로 향한다.


쫄깃한 식감을 좋아하는 엘리가 이곳 베이글을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런 날엔 파넬라에서 베이글을 사는 게 하나의 루틴이다.


우리는 블루베이 베이글과 시나몬 베이글 한 개씩 주문하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엘리는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베이글 두 개를 순식간에 해치운다.


구글맵을 따라 20분쯤 달려 산타아나에 새로 생긴 도서관에 도착했다. 밖에서 보기엔 예쁘고 아기자기했지만,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릴스에서 본 거처럼 도서관 외관은 깨끗했지만, 도서관을 둘러싼 동네는 달랐다. 집들은 오래돼 보이고 낡았으며, 거리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고 썰렁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반겨주고, 아직 페인트 냄새가 남은 새 건물이다.


안내원의 안내를 따라 어린이실로 들어갔더니 그곳은 경비원 한 명, 도서관 직원 서너 명, 그리고 약속한 학교 친구 엄마와 아이들뿐이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같은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아무도 없네요ㅎㅎ”
“그러게요… 하하”
“근데 여기가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동네 중 한 곳이래요.”
“갱스터들이 많이 산대요.”
“앗… 그래요?ㅎㅎ 어쩐지 동네 분위기가 험해서 뭐지 싶었어요.”


몇 분 뒤, 사서가 다가와 썸머 리딩 챌린지를 소개했지만 우리는 오늘 한 번 방문한 이용객이라며 머쓱하게 대답했고, 사서도 머쓱하게 돌아섰다.


창밖엔 작은 놀이 공간과 공원, 놀이터가 보인다. 그래도 도서관에 왔으니 책은 조금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아이들과 10분쯤 책을 읽었지만 아이들은 금세 밖으로 나가자며 보채기 시작한다.

공원도 있고 돗자리도 챙겨 왔으니 점심이나 먹자며 도서관 밖으로 나와 공원 잔디에 발을 들이는데 잔디밭에 보인 건 ‘개똥 천국’이다.


“음…여기는 아닌 거 같아요. 다른 데로 옮길까요?”


괜히 같이 가자고 한 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친구 엄마는 싫은 내색 없이 “다른 데로 가자”라고 말해준다..


조금 더 내려가면 있는 코스타 메사 OC 도서관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하고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각자 그곳으로 향했다.


Donald Dungan OC Library

코스타 메사에 도착하자마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공기부터 다르다. 당장이라도 바다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아… 수영복을 챙겨 올 걸 그랬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래, 날씨도 흐리고 추우니까 못 갈 거야’ 하며 애써 위로했다.


도서관 앞 놀이터는 가족들로 북적였다. 단지 20분 거리인데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 수 있나 싶었다.


그래도 산타아나 동네에도 어린이를 위한 안전하고 쾌적한 도서관이 생긴 건 정말 칭찬받을 일이다. 그 지역 아이들도 책과 가까워지고, 언젠가는 그 동네도 안전하고 활기 넘치는 곳이 되길 바란다.


코스타 메사의 OC 도서관은 엘리가 특히 좋아하는 곳 중 하나다. 짚라인 그네와 다양한 놀이기구가 있어서 우리도 정기적으로 찾는다.


우리는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친구 엄마가 싸 온 치킨 데리야끼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바닷바람이 매서웠지만, 작은 텐트 안에 옹기종기 모여 먹는 밥은 진심 꿀맛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은 놀이터로 뛰쳐나가더니 놀이터 구석에 놓인 작은 모래장에 모여 모래놀이에 푹 빠져버렸다.


‘아… 수영복… ‘ 집에다가 놓고 온 해변 가방이 아른 거린거려 괴롭다.


마침 점심때가 되자 하늘은 구름이 걷히고 해가 쨍하게 떴다.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근처 마트에서 수영 바지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나맘.. 저희… 바닷가 갈래요?”

하.. 또 계획 변경이다.


친구 엄마는 다행히 아이 갈아입힐 옷도 챙겨 오셨다며 바닷가로 가자고 흔쾌히 허락했다.


Scavenger Hunt

우리는 출발 전에 화장실 들르러 도서관으로 들어갔다가 데스크에서 ‘Scavenger Hunt’ 종이를 발견했다.


아이들은 신나서 연필과 종이를 들고 도서관 안을 돌아다니며 숨겨진 그림을 찾는다. 엄마들도 함께 찾을 정도로 꽤나 어려웠지만 결국 찾아냈고, 아이들은 작은 선물을 받아냈다.


작은 미션을 성공한 후 우리는 도서관을 나와 다음 장소를 정했다. 뉴포트 비치에 있는 ‘마리나 공원’이라는 해변인데, 파도도 없고 놀이터도 있어 엄마들 사이에서 핫플레이스이다.


그전에 마트에 들르기로 하고 친구 엄마는 먼저 출발했고, 나도 뒤따라서 출발하기 위해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갑자기 핸드폰 데이터가 안 된다. 좀 전까진 잘 됐는데… 선불폰 특유의 데이터 이슈가 또 터진 것이다.

다행히 친구 엄마가 구글맵을 캡처해서 보내주셨고, 사진을 보며 복잡한 뉴포트 비치 타운을 헤매 도착했다.


5분 거리를 30분 넘게 헤매서 도착하다니…이 와중에도 묵묵히 기다려준 친구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다.


마트에서 수영 바지를 사고 나와 우리는 옆 베이커리도 들렸다. 내 생일인 걸 아신 친구 엄마가 그래도 생일인데 생일분위기는 내야 한다며 케이크를 결제했다. 오늘 신세를 이렇게 지나…. 미안힘과 고마움 투성이다.


게다가 자신의 세컨드 폰까지 꺼내주셔서 그걸로 구글맵을 사용하며 마리나 공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토요일 오후 2시 반, 해변 주차장은 만석이다. 30분 넘게 돌고 돌아도 자리가 안 나서 우리는 목적지를 다시 변경했다.


그나마 파킹장이 넓은 ‘발보아 비치’에서 만나기로 하고 다시 15분을 이동, 다행히 발보아에선 파킹에 성공이다.


자동차 트렁크엔 얼마 전 새로 산 비치 우산이 있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나는 당당히 비치 우산과 돗자리를 챙겨 아이와 함께 바다로 향했다.


드디어 힐링 타임이 시작되었다. 마음이 급한 아이는 수영 바지로 갈아입고, 신발과 양말을 벗고는 바다로 뛰어간다.


밀려오는 파도를 피해 뛰어다니고, 발가락 사이로 들락날락하는 모래에 간지럽힘을 느끼며 금세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나와 친구 엄마도 비치 우산 그늘 아래 앉아 드디어 수다다운 수다를 떨며 교제를 시작했다.


한참을 수다를 떨고 있는데 아이들이 모래와 조개로 케이크 모양을 만들고는 나에게 “생일 축하해요“ 라며 소리친다.


“얘들아, 배고프지? 우리 이제 진짜 케이크 먹자!”

생일 케이크

나는 하얀 박스에 담긴 케이크를 짠 바닷바람에 날려오는 모래가 묻지 않도록 조심스레 꺼냈다.


그리고 곧 7살, 6살, 2살 아이들이 불러주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생일 축하 노래가 해변에 울려 퍼졌다.


캘리포니아의 강한 오렌지빛 노을과 태평양 파도. 그 사이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이렇게 행복하려고 지금껏 잘 살아왔구나’ 싶었다.


그저 계획대로 지나갈 줄 알았던 하루가 예상 못 한 사건들로 가득했지만, 그 모든 변수가 모여 가장 특별한 생일날을 만들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행히 구글맵 없이도 길을 찾아왔고 차도 밀리지 않았다.


뒷자리에서 곤히 잠든 엘리를 백미러로 바라보다,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인간이 계획하면, 신은 웃는다고 한다.

살아 보니 내가 열심히 계획한 대로 안 되는 경우가 참 많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나의 계획함보다 더 큰 깨달음과 축복으로 채워졌다.


내가 믿는 신은 언제나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주셨다.


비록 계획이 깨지고 틀어지는 순간에는 괴로움과 절망감도 함께 동반했지만 그 끝은 언제나 더 좋은 걸로 채워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랬다.


나는 계획했지만, 신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닌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그분의 인자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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