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칫 잘못하면 '자기감정'이 우상이 될 수 있다.
한국대학생인재협회(이하 '한대협')에서 20여 년간 만여 명 넘는 대학생 친구들을 접했다. 대학생들 중 상당수가 '행복하게 사는 게 목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그 '행복'이라는 워딩에 대해서 확실한 정의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힘든데 왜 인내해야 하는지, 왜 헌신해야 하는지, 왜 때로는 손해도 볼 수 있어야 하는지, 왜 안주하면 안 되는지' 등 수많은 의문에 답을 찾을 수 없다.
위와 관련하여 몇 주 전 시청한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TV프로그램의 한 사례가 생각난다. 해당 사례 속의 어머님은 아이가 아빠한테 욕을 하는 등의 잘못을 저지른 상황 속에서도 훈육은 생략하고 아이의 감정 읽기, 마음 읽기를 해주었다. 아이의 감정을 과잉 존중해 주니, 아이는 자기감정이 최고 우선순위가 되어 자신이 기분 나쁘면 아빠에게도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 문제 행동을 일삼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자기가 행복한 것이 가장 최우선이 되면 타인이나 가족, 더 나아가 조직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결국 그 사람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망친다. 즉, 자기 행복을 우선하는 자세가 오히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
같은 맥락에서 자기 행복이 우선되면 일상을 살아갈 때 인내와 끈기를 발휘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힘들다. 인내하지 못하는 만큼 그 사람은 성장하지 못한다. 우리가 삶을 돌이켜보면 공부하는 과정도, 일하는 과정도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다. 또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는 것도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다. 오히려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은 잠깐이고, 번민하며 고민하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 내가 만약 내 행복을 가장 우선했다면, 나는 가정도 지키지 못했을 것이요, 리더직은 쉬이 그만뒀을 것이요,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지금의 동역자들을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목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챌린징 한 성격이 있어야 하는데, '행복'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구체적 정의를 내리지 않고 행복 자체를 목표 삼으면 챌린징보다는 현실에 안주해 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한 사람인데 오늘 맛있는 걸 먹었으니까 내 목표는 달성됐다'는 식의 사고가 가능하다. 혹시라도 이런 사고 회로를 돌린다면, 목표 설정을 다시 하기를 권한다. 행복이라는 게 마치 진리인 양 여겨지는 세태 속에 이런 소리가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지속적인 성장을 원한다면 제대로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목표라는 것은 지속적인 동기부여가 되어야 한다. 목표 자체가 나의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고 꾸준히 노력할 만한 동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목표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동기가 되기도 하며 좌절의 순간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 목표가 없다면 깊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많은 청년들에게 이 부분을 더더욱 강조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목표는 '사회'에 '긍정적인 가치'를 더하는 목표다. 사람들마다 사회와 가치를 정의하는 것은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사회를 '가정, 학교, 지역, 국가, 세계'로 정의할 수도 있고 '어린이, 여성, 청년, 노인, 사회적 약자' 등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가치를 정의할 때는 '사랑, 헌신, 인내, 평화, 용서, 배려, 질서, 보호, 비폭력' 등으로 구체화시킬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사명감까지 느끼는 목표라면 가장 강력하다.
개인적으로 나의 목표는 내 달란트와 에너지를 완전 연소하여 찌꺼기 없이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내 인생이 주님을 전하는 메시지가 되었으면 한다. 그 맥락에서 사적인 모습조차 귀감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집에 있을 때의 모습, 남편과 자녀만 보는 모습도 존경할 만한 사람, 신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