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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조절의 미학

앞서가기보다 곁을 맞추는 태도

초등학교 5학년 시절, 과학 시간에 있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선생님께서 실험을 설명하시던 중, 나는 다른 친구보다 내용을 빠르게 이해했고, 한 친구와 함께 질문을 쏟아내며 수업에 몰입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단호하게 말했다. “조금 기다려. 친구들이 이해할 시간을 줄 줄도 알아야 해.” 그때부터 나는, 무언가를 잘한다고 해서 무조건 앞서 나가는 것이 옳은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특히 함께하는 환경에서는 속도를 조절할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음 인식한 순간이었다.


이 경험은 이후 내가 조직에서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늘 마음에 새기는 원칙이 되었다. 의욕이 높고 실행력이 빠른 나의 성향은 때로 팀 내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대학생인재협회에서 리더로 활동하며 다양한 팀을 이끌고 관찰해 온 결과, 혼자서만 빠르게 가는 사람은 팀 내에서 의외로 신뢰를 잃기도 쉽다는 것을 자주 확인해 왔다.


한 팀장이 있었다. 몇몇 팀원들이 제출한 과제물에 대해 팀장은 성의껏 피드백을 해주었지만, 그 피드백이 실제 결과물에 반영되지 않았다. 그는 점점 답답함을 느꼈다. 다른 팀의 업무 진행 속도를 보며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그때 이 팀장이 선택한 방식은, 팀원들과 더 깊이 있게 이야기하거나 피드백 방식을 구체화해 조율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차라리 자기가 다 처리하는 것이 낫겠다 판단하고 그 업무를 떠안기 시작했다. 결과는 뻔했다. 팀원들은 점차 팀에 기여하고 있다는 감각을 잃었고, 점점 소속감도, 몰입도도 떨어졌다. 팀장은 팀장대로 점점 과중한 업무에 지쳐갔고, 팀은 점점 활력을 잃어갔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핵심은, 아무리 역량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팀 안에서는 ‘혼자 다 하는 사람’이 되면 팀 전체의 성장 기회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나간다는 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다. 나의 속도만큼, 팀원들의 상황과 리듬을 고려해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팀 활동에 필요한 덕목이다.


그리고 이 속도 조절은 인간관계의 문제를 푸는 데에도 적용된다. 만약 나 자신은 마음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빨리 이야기해서 풀어버리고 싶어 하는 성향일지라도, 상대방은 감정이 풀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일 수 있다. 이럴 때는 나의 속도만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그 사람의 감정 흐름을 배려하며 기다려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관계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감정의 회복에도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한 리더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기획력도 뛰어나고, 팀원들과의 대화도 능숙한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가 나를 비교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표정, 행동, 분위기에서 느껴졌다. 나는 그의 성향이 방어적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일부러 따지거나 캐묻지 않았다. 그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그를 위해 기도하며 기다렸다. 2년쯤 흐른 어느 날, 그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그동안 자신이 비교하느라 많이 힘들었고, 이제는 그런 감정에서 벗어났다고. 지금은 마음이 편하다고 고백해 주었다. 그 순간, 관계에서도 속도 조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속도 조절은 단순히 배려의 차원을 넘어선다. 함께 걷기 위한 전략이고, 조직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리더십의 실천 방식이다. 혼자서 빨리 가는 것보다, 다 함께 멀리 가는 것이 더 큰 가치를 만든다. ‘혼자 다 했다’는 말을 자랑처럼 여기는 태도보다는, ‘우리가 함께 만들었다’는 결과를 자랑스럽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조직에서 오래 살아남는다. 나의 실력만이 아니라, 함께 가는 과정까지 고민할 줄 아는 사람이 결국 더 신뢰받는 사람이다.


candra-winata-CYOFvtpOIpU-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Candra Win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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