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역할을 끝내는 순간, 변화가 시작된다
"저는 잘해보려고 했는데, 결국 저 사람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어요."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 스스로 이런 말을 해본 적도 있을 것이다. 억울한 일을 겪거나, 누군가의 무책임한 행동에 상처받았을 때, 자연스럽게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처음에는 스스로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이 반복되기 시작하면, 어느새 마음속에 "나는 피해자고,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있다"는 사고방식이 깊게 자리 잡는다.
이러한 생각은 어떤 일이든 내가 바꾸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바뀌어야 해결된다고 믿게 만든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곧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자기 효능감이 낮아지면서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말은 그냥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다. 반복되는 말은 내 생각을 만들고, 그 생각은 결국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행동이 쌓여 지금의 삶을 만든다. 그래서 말투 하나, 말버릇 하나를 돌아보는 일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
피해자의 언어가 가지는 첫 번째 특징은, 감정을 앞세운다는 점이다.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기보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라는 감정부터 꺼낸다. 물론 고통받은 경험을 나누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감정을 털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감정이 대화의 중심이 되고 끝이 되어버리면, 문제는 더 깊어지고 갈등은 더 복잡해질 뿐이다. 특히 조직이나 관계 속에서는 감정 중심의 대화가 오해를 부르고, 갈등과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주도적인 사람을 '가해자'처럼 인식한다는 점이다. 조직이나 공동체 안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직언을 하거나 방향을 제안하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피해자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은 그런 사람의 말과 태도를 불편하게 여긴다.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해요?", "또 나만 시키는 거 아니에요?"와 같은 말은, 타인의 제안이나 피드백을 '지적'이나 '공격'으로 받아들일 때 나오는 반응이다. 실제로는 함께 성장하자는 말일 수도 있고, 단순한 역할 분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피해자 프레임에 갇히면, 어떤 말도 나를 탓하는 말로 들리고, 어떤 요청도 나를 몰아세우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 결과,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사람은 점점 더 고립된다.
세 번째 특징은, 삶의 주도권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피해자의 언어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나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상황이 변하지 않으면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누군가가 먼저 바뀌지 않으면 나도 바뀌기 힘들다고 단정 짓는다. 그런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삶을 활력 있고 생기 있게 살아갈 이유를 찾기 힘들어진다.
네 번째 특징은, 언어 표현이 극단적이라는 점이다. 피해자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종종 말의 강도를 조절하지 못하고 상황을 훨씬 더 크게, 훨씬 더 나쁘게 표현한다. "나만 맨날 손해 봐",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어", "나는 항상 혼자였어"처럼, '항상', '절대', '완전', '죽을 만큼'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물론 그 감정 자체는 진심이지만, 말의 강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듣는 사람은 부담스럽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면 할수록 실제로 부정적인 감정이 증폭되어 힘들어한다. 또한 이들은 건강한 피드백이나 위로가 들어올 여지를 차단한다. 상대가 "꼭 그렇진 않아"라고 말해도 "당신은 몰라요"라고 되받아친다. 결국 이런 말들로 인해 상대와의 거리가 더 벌어지며, 자신의 마음도 더 복잡하고 힘들어지게 된다.
다섯 번째 특징은, 자기 연민에 빠지는 말이 많다는 점이다. 피해자의 언어를 자주 쓰는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힘든 사람인지', '얼마나 불쌍한 처지인지'를 자주 말한다. "나만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도 없는데 왜 나만 이렇게 안 풀리지?", "난 늘 뭔가 부족한 사람인 것 같아" 같은 말들이 대표적이다. 물론 누구나 힘들 때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말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스스로 그 감정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안 됐는지를 말할수록, 그 말에 스스로도 설득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거기서 빠져나오려는 의지조차 사라지게 된다. 이런 자기 연민은 겉으로는 나를 위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 마음을 더 약하게 만들고, 문제를 해결할 힘도 빼앗는다. 또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처음에는 안타깝고 공감하지만, 나중에는 지치게 된다. 왜냐하면 아무리 위로해도 상대는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문제만 파고들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은 존재한다. 가족, 상사,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들 때문에, 때로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나 부실한 조직 운영 등으로 인해 억울한 일을 겪을 수 있다. 그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을 피해자라는 정체성에 가둘 것인가, 아니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며 주도적인 태도를 선택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해석은 내 몫이다. 똑같은 상황도 내가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정을 낳는다. 상황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나의 태도도 바뀔 수 있고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
나 역시 누군가를 탓하며 살 수도 있었다. 가정생활을 예로 들자면, 남편이 가정을 소홀히 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나는 지쳤고 외로웠고 억울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남편을 바꾸는 데 집중할수록 나는 더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피해자의 언어를 쓰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기로. 그렇게 말과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을 때, 나는 무너지지 않고 가정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남편도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남편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때로는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남편의 변화와 성장을 내가 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그리고 이 순간을 맞이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장 크지만, 내가 피해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마인드 트레이닝을 반복하고 끝까지 인내한 노력도 분명히 있었다.
피해자의 언어는 누구나 쓸 수 있다.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단지, 그것이 습관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일시적인 하소연은 괜찮다. 하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기본 태도가 그렇게 굳어지면, 스스로를 계속 무력한 위치에 놓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자주 쓰는 언어를 점검해봐야 한다. 내 언어는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멈춰 서게 만들고 있는지 성찰해봐야 한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내가 자주 반복하는 말은 결국 나를 형성하고, 내가 가는 방향을 결정짓는다. 피해자의 언어가 포착됐다면 이제는 그 언어를 멈추고 변화를 주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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