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하게 밥을 먹고 생당근을 씹고 있다. 우두둑우두둑. 새벽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도 할 듯. 남편은 “넌 아프지 않아.”라고 간밤의 고난을 일축했다.
그러나 불과 30분 전만 해도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으리, 다짐을 했건만 뚱보 본인은 늘 이런 식이다. 건강한 회복탄력성은 나의 씹기 욕구를 이겨내지 못한다. 하지만 아직 속은 쓰리다. 그래서 뭔가 뱃속에 다스릴 것을 찾아 넣어 주는 것이었다.
여전히 난 몸이 힘든 게 맞다. 오전 일정도 취소했으니. 하지만 의지적으로 붙들고 있는 오전 9시 이전 하루 루틴을시작해야 한다.
고등학생 딸아이의 무거운 가방을 실어다 학교 앞에 내려주려고 덤으로 가방의 주인까지 옆에 태운다. 적어도 아침 길 스트레스는 내가 줄여준다는 소명 하에 걷기도 타기도 애매한 거리를 – 반은 걸어야 하고 반은 타야 하는- 교통의 난해함을 나의 아침 시작으로 아이를 데려다주는 것이다.
종종 “애 혼자 가게 두세요. 엄마.” 하는 지탄을 받기는 하지만 어느덧 그 얇고 가는 종아리가 탄탄한 알박임의 되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가늘던 허리가 나를 닮아가고 키도 더 이상 크지 않으나 심적 스트레스는 높아가는 애의 모습이 덜컥, 적어도 아침 서비스 정도로 위로가 된다면 지켜주리라 싶었다. 아들은 모르는 엄마만의 신념이다. 스스로 그 가늘던 섬섬옥수의 손가락이 쭈그럭 늙고 거칠어진 것을 볼 때마다 느끼는 자괴감이 어떤 건지 고생을 해본 사람만 아는 아픔이다. 나는 결코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다. 좀 들어봐라. 요즘 같은 시절에 그것도 어떻게든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애쓰는 녀석을 보며 앉아서 굵어지는 아이의 변신을 보고 가만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걸 서글프게 겪은 이로서.
웃기게도 관리하고 얌전히 누워 마시지 받을 수 있는 인생이 있고, 쟁일 서서 물건을 팔며 먼지 털어내는 인생이 따로 있으니까. 그걸 또 몸소 체험해 온 인생이니까, 강하게 키우고 싶긴 하지만 적어도 엄마 서비스가 그 정도는 들어가도 되는 것이지. 아들아.
덕분에 아들은 제법 독립적으로 걸어댕기고 자전거를 타고 해서 더욱 길고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딸은 점점 나를 닮아가는 것이 관리 안 하면 아차 싶은 것이었다.
그 가늘던 다리가 20대 서서 일하며 알 배기고 넘어져 다치고 부러지고 절둑거리던 인생,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젊음의 시절이 다 가고 있는 중년의 이때. 무섭게도 그랬던 인생은-험하게 사는- 여전히 그렇게 산다는 기시감에 엄마의 존재는 그럼, 아이를 가꾸어 주는 역할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단지, 20대를 열심히 살아서 착하고 순진했다는 말은 멍청하고 미련했기에 도맡아 종아리가 붓던 그 인생을 되물림까지 하기 싫어서 어쩌면 최면을 걸고 있는지 모른다. 다른 엄마들도 그랬던 말일 테지만 넌 안 돼. 나처럼 살지 마. 곱게 크거라. 그렇게 늘 주문을 왼다.
누구나의 인생이 하나로 재단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늙고 초라해지는 불편한 진실은 벗어날 수 없다. 내면이 얇은 사람에게는 말이다. 강산이 몇 번 바뀌는 시간 동안 많이 다져졌다고 여겼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두꺼운 손마디의 진실을 스스로 극복할 수가 없다. 다 잊고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나의 메타차원에서는 늘 같은 버그를 앓는다. 이젠 지겹기까지 한 소외. 나는 늘 소외되어 왔다. 그래서 소외된 누군가를 찾아 돕고자 했지만 내가 누굴 도울 수 있는가. 오히려 상처가 되고 내상을 입어 달팽이가 되고 마는 것을.
애를 데려다주고 오는 차 안에서 십 원을 발견했다. 앗! 더러운 것. 더러운 붉은 십원을 보고 혹시 80년대 희귀한 적동이 아닐까 호기심이 생겼다. 당연히 차를 같이 쓰는 남편이 홀더에 던져 놓은 것일 터. 그 더러운 동전을 굳이 들고- 평소 백 원이 땅에 떨어져도 줍지도 않던 내가- 집에 가지고 들어갔다. 아침부터 손목 터너로 설거지도 못하는 내가 수세미로 박박 밀어대니 쇠냄새가 진동한다. 어휴~ 간밤 매스꺼운 속을 다시 뒤집는다. 그럼에도 나는 손끝이 갈라질 것을 무시하고 비누까지 묻혀 빡빡 문질러 댄다. 시커먼 먼지물이 흘러가고 동전 하나에 들인 물리적 압력과 수돗물의 가치를 생각하며 미칠 듯이 후회스러웠지만 나는 그 적동에 집착했다. 앗! 땟국물을 좀 벗겨주고 나니 이 자식은 적동이 아니었다. 젠장, 황동 십 원이었다. 그렇지, 십 원 적동이 있을 리 있나. 단지 86년대 찍은 다보탑의 버전이 약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묘한 집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출근을 앞둔 남편은 “뭐얏! 그걸 왜 닦아. 물 아깝게!” 소리친다. 그는 이런 식이다. 자기가 던져놓은 거면서. “이걸 어디서 났어?” “대명리 바닷가에서 주웠지.” 그러니까 이걸 왜 주워왔느냐는 거지. 어느 동물의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건지도 모를 이 물건을 왜 주워다 내 차 홀더에 던져 놓았느냐는 것이다. 나는 또 그 물건을 굳이 가져다가 열심히 10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대며 닦고 있는 것이다. 분한 것은 아무리 닦아도 반질반질 윤이 나지 않는다. 군데군데 디테일한 때가 벗겨지지 않는다. 어깨 회전 근육이 파열된 나로서는 더 이상 손쓸 수 없다. 약값마저 계산될라치면 십원 회생의 기회비용이 너무 커져버린다. 결국 베이킹파우더물에 담가 놓았다. 오후가 되면 좀 윤이 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