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영화 엔칸토와 페미니즘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라 파밀리아 마드리갈!
스페인어를 잠시 공부한 적이 있었다. 아스트라 피아졸라의 반도네온 연주에 빠져 아르헨티나에 탱고음악을 직접 들으러 가리라 다짐했었다. 학원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할 때마다 영어와 프랑스어가 뒤섞여서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단어의 발음이 프랑스어보다 솔직한 편이라 친근한 느낌이 들었었다. 주류인 영어가 아닌 비주류인 스페인어로 영화를 만든 것부터, 이 영화는 심상치 않다.
눈을 떠요.
#주인공 미라밸
겨울왕국의 엘사나 안나의 비주얼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작은 키에 까만 피부, 통통한 볼살, 곱슬머리, 그리고 안경을 낀 주인공 캐릭터라니. 미라밸의 등장만으로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반 인종주의와 페미니즘이 세계적인 화두이고, 이것이 디즈니 메인 캐릭터로 인정받은 기분이 들어서다. 미라밸의 노래에서 어색함을 느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미라밸의 목소리도 중저음이라 낯설어서 그랬던 것 같다. 겨울왕국의 엘사 같은 여리고 높은 음성이 아니라 중저음의 목소리. 혹시 해서 찾아보니 더빙판, 영어판 모두 같았다. '아름다운' 비주얼에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기대하고 디즈니 영화관을 찾았던 관객들에게는 초반에 '낯섦'을 제공하지만, 영화를 계속 보다 보면 (그들의 기준에)'덜 아름다워'도 '중저음'이어도 좋고 예쁘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외모적으로도 매우 급진적이지만 미라밸의 역할 또한 좋았다. 주위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런 특별한 능력을 받지 못한 상황. 주변 사람들이 환호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에도 어두운 그늘 한편에서 존재감 없이 미소 짓고 그들을 축하하는 미라밸. 특별하게 내세울 것은 없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이.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조용한 아이들과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그런 미라밸이라고 해서 완벽할 수는 없다. 자신만 특별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지만 때로는 억울하고 화도 난다. "넌 특별하지 않잖아."라는 말을 계속 들으면서 잘 참아왔던 미라밸도 폭발하기도 한다. "눈을 떠요."라고 노래를 부르며 "더 이상 참지 않겠어."라고 다짐한다.
자기도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일을 벌이다 수습이 잘 되지 않자 "'무언가'라도 되고 싶었어요."라고 고백하는 미라밸. 드라마 '인간실격'에서 '부정'이 "난 아무것도 되지 못했어요."라고 오열하는 장면과 오버랩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묻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모르겠어요."라고 겨우 답을 한다. 우리가 커 가면서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라는 압박을 전 세계 아이들과 어른들이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괜찮은 것. '무언가'가 꼭 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기적이라는 것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함께 힘을 합치며 살아가고 따뜻한 말을 주고받는 것이라는 것. 진정한 기적의 의미에 대해 미라밸은 알려준다.
나도 힘이 들 때가 있어.
#언니 루이사
루이사는 힘이 세다. 엄청난 어깨 근육과 드넓은 등판을 자랑하며 씨익 웃는다. 무거운 짐을 옮기는 것은 당연히 남성들의 일로 치부되어 온 것을 가볍게 무시하며 루이사는 성실하고 당연하게 온 마을의 짐꾼, 수리꾼의 역할을 도맡는다.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루이사에게도 부담감이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쉬지 않고 일하던 루이사. 그녀에게 해먹에서 편히 누워 쉴 시간을 주는 당나귀. 항상 최선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루이사가 우리네 부모님 같기도, 우리 같기도 했다.
각진 얼굴, 넓은 어깨를 자랑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여린 루이사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 꽃도 너무나 사랑스러운걸.
#언니 이자벨라
키 크고 늘씬한 몸매로 핑크빛 공주 드레스를 입고 길고 풍성한 머리를 유지하며 장미꽃을 뿌리는 이자벨라. 사회에서 '공주, 늘씬함, 여리여리함, 미소, 행복을 전달하는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요구받는 '여성'의 표본을 보여준다.
그러다 자신이 원하던 삶은 이게 아니었구나를 깨닫고 변화한다. 핑크빛 드레스는 오색 찬란하고 얼핏 보면 더러워 보이기도 하는 옷으로 바뀌고, 길고 풍성한 흑발의 머리는 총 천연색으로 탈색과 염색을 반복한 머리로 변신한다. 매끄러운 피부는 어딘지 모르게 자유로운 먼지가 묻어있는 것처럼 달라져 있다.
정원사처럼 반듯하게 가꾸어진 장미꽃만 뿌리던 그녀는 야자수와 선인장 꽃, 끈끈이주걱을 신나게 뿌리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야말로 집과 거리는 '정글'이 되었지만 사실 '자연'에 무슨 틀이 있으랴. 정글의 야자수와 이름 모를 총 천연색의 꽃들에게서도 낯섦을 느꼈다. 그들도 유럽의 정원에서 볼 법한 장미꽃 못지않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라는 걸 그동안 난 몰랐던 거다. 이 또한 '선량한 차별'이었구나 반성하며 이자벨라에게 고마웠다.
#마을 사람들 - 연대
미라밸의 집 '라 까시따'가 무너져 버리고 모두가 좌절하고 있을 때 멀리서 마을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절망의 순간에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들'의 힘. 나는 사람들이 힘을 합치는 장면에서는 영화든 실제 상황이든 항상 눈물이 난다. 플래시몹을 하는 유튜브 영상에도, 지하철 플랫폼에 다리가 빠진 사람을 위해 길을 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전동차를 밀어 구출했을 때에도, 코로나 블루를 이겨내기 위해 줌으로라도 모인 여러 나라 사람들의 온라인 합창 영상에도. 절망적인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길은 연대밖에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겉으로는 특별해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을 돕느라 '나'를 돌보지 않았던 언니들. 겉으로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애정을 쏟고 도움을 주는 미라밸.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한 것이 특별하지 않은 것은 아닌 것. 생김새나 능력이 달라도 너희는 하나하나 소중한 사람이라고 따스히 말해주는 엔칸토 제작진에게 그 어떤 디즈니 영화 제작진들보다도 고마웠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음이 멈추지 않았던, 두 번 볼 때에도 똑같았던, 자존감 낮은 요즘 아이들이 보면 좋을만한 영화다. 추천 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