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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Mar 11. 2019

9. 복지수당이 어떻게 노동의 대가인 걸까?

-임금이분설의 파기와 부활-

은서야, 오늘 쓸 내용은 사실 이미 등장했어야 할 주제야. 

너무 초반에 이 주제를 얘기하면 네가 임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이 사라질까 봐 조금 늦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주제지. 

그렇다고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어. 생각보다 복잡하지는 않단다. 단지, 임금이분설같은 학문적인 용어가 등장하다 보니까, 네가 아예 편지를 읽지 않을 것 같아서, 이제야 글을 쓰는 거야. 전혀 내용은 어렵지 않아. 알았지? 중간에 편지, 접지 말았으면 해. 임금에 관한 한, 아주 중요한 대법원 판례를 설명하는 거니까. 임금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판례라고 볼 수 있지.


1. 임금이분설은 죽었다.      


은서야, 지금까지 편지를 읽으면서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니? 임금인지 아닌지를 지급의무와 지급형태로 판단하면서, 복리후생적 명칭을 지닌 급여라고 하더라도 노동의 대가로 판단하는 법원의 시각이 말이야. 

오늘은 그 의문에 대해서 근본적인 법원의 철학을 나눠볼까 해.      

그 출발점이 바로 임금이분설이라는 견해야.       


임금에는 현실적인 노동의 대가로서 지급되는 것(이른바 교환적 성격의 임금)도 있고, 노동자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성격으로 지급되는 것(이른바 생활보장적 성격의 임금)도 있다는 견해가 임금이분설이야. 임금을 두 가지로 나눈 거지. 노동을 해야지만 주는 임금, 그리고 현실적으로 노동을 하지 않더라도 직원의 복지를 위해서 주는 임금으로 말이야. 


예를 들어 볼까? 교환적 성격의 임금이란 기본급이나 연장근로수당 같은 것들을 의미하는 거고, 생활보장적 성격의 임금이란 가족수당이나 주택수당, 복지수당, 교통비, 숙박비 같은 것들을 의미하는 거야. 

과거에는 법원에서 임금을 설명할 때, 임금이분설의 입장을 취했어.      


그런데, 어떤 노동조합이 파업을 했어. 파업기간 동안 임금이 어떻게 지급되는지는 알고 있니? 아마도 무노동무임금 원칙이라는 용어를 많이 들어봤을 거야. 그래. 파업은 노동조합원들이 집단적으로 노동을 하지 않는 거야. 노동을 하지 않았으니, 결과적으로 임금을 지급해야 할 의무도 없지. 

그래서 회사가 파업기간 동안에 임금 전액을 지급하지 않은 거야. 그런데 노동조합에서 문제를 제기했어. ‘일을 하지 않은 거니까, 노동에 따른 대가로 지급하는 교환적 성격의 임금은 지급하지 않은 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직원들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성격의 임금은 지급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이지.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파업기간이라 하더라도 생활보장적 성격의 임금은 지급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한 거야. 어때? 그 당시 노동조합의 주장이 일리가 있지 않니? 맞아. 임금이분설이라는 법리를 채택하고 있다면, 노동조합은 합리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     

하지만, 법원은 그런 결과가 싫었어. 파업을 하면, 임금 전부를 줄 필요가 없다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싶었지. 하지만, 생각해 보렴. 임금이분설을 유지하면 파업기간이라 하더라도 생활보장적 성격의 임금은 지급해야 해. 그게 당연한 논리적 귀결, 아니겠니? 

그런데, 법원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철저히 관철하고 싶었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빙고. 맞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임금이분설을 없애야 했지. 모든 임금이 다 노동의 대가가 돼야지만 완벽하게 무노동무임금 원칙이 관철될 수 있는 거야.      

이미 법원은 1995년도에 임금이분설을 파기했어. 옛날 옛날 옛적 일이야.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생활보장적 성격의 임금이란 없다는 거야. 모든 임금은 다 노동의 대가라는 거지. 이런 법리를 임금일체설이라고 부르기도 해.       


임금이란 근로의 대가로서, 현실의 근로제공을 전제로 하지 않고 단순히 근로자로서의 지위에 기하여 발생한다는 이른바 생활보장적 임금이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임금을 2분할 법적 근거가 없다.(대법원 1995.12.21. 선고 94다26721 전원합의체판결)     


그때부터 모든 임금은 다 노동의 대가가 되었단다. 생활보장적 임금이란 없다는 거야
 그리고 노동의 대가로 지급되고 있는 것인지는 지급되는 명칭이 아니라, 지급의무가 있는지 그리고 지급형태가 계속적·정기적인지에 따라 판단하기 시작했어.  

교통비도, 식비도, 그리고 복지수당도 지급의무가 있고 계속적·정기적으로 지급되고 있으면 명칭과 관계없이 다 노동의 대가라고 판단한 거야.      


요약하면, 파업기간 중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관철하기 위해 임금이분설이라는 판례법리를 법원은 파기했단다. 그리고 임금인지 아닌지를 지급의무와 지급형태라는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임금이분설의 파기는 통상임금의 확대라는, 법원이 의도하지 않았을 것 같은(?) 결과로 이어졌어. 임금이분설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에는 통상임금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던 수당들이 통상임금 속으로 거침없이 밀려들기 시작한 거지. 매월 지급되지 않은 각종 복리후생 관련 수당들도 통상임금의 범위에 대량 유입되었단다. 변경된 판례법리의 나비효과라고나 할까. 아직 임금도 다 마무리 못한 마당에 통상임금까지 얘기하면 네가 너무 지칠 것 같아서, 이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을게.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거야.      


2. 임금이분설은 살아 있다(?)       


사실 임금이분설의 파기로 명칭의 효용은 끝난 것 같았어. 중요한 것은 지급의무와 지급형태일 뿐이었지. 

그런데, 화석과도 같이 오래전에 생명을 다한 임금이분설은 여전히 끈질기게 그 생명력을 유지해 오고 있단다.

 

오해하지 마. 임금이분설은 이미 죽었어. 그런데, 마치 임금이분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는 거야. 특별히 최저임금의 영역에서 마치 미라가 부활한 것처럼 임금이분설은 그 존재 의의를 뽐내고 있단다. 통상임금에 관한 최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에서도 임금이분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    

  

이제 법원에서는 생활보장적 성격의 임금이란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임금이분설이 살아 있는 걸까? 최저임금법을 잘 보렴. 이런 표현이 나와. 최저임금법 제6조 제4항 제3호에 나오는 표현이지.      


식비, 숙박비, 교통비 등 근로자의 생활보조 또는 복리후생을 위한 성질의 임금으로서...     


그래. 분명 판례에서는 생활보장적 성격의 임금이 파기되었다고 했는데, 최저임금법에는 버젓이 생활보조를 위한 성질의 임금, 복리후생을 위한 성질의 임금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러한 임금을 최저임금의 범위에서 제외했다가, 2019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해서 얼마간의 금액은 포함시키기로 법을 시행하고 있단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복지수당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면, 최저임금의 범위에서 제외시켰어.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복리후생을 위한 성질의 임금이라 하더라도 매월 지급되는 경우 일정액의 금액을 최저임금의 범위에 포함하는 것으로 법을 개정한 거야. 


오늘은 너무 배가 산으로 가는 느낌이지? 임금이분설이 나오지 않나, 통상임금이 등장하지 않나, 이제는 최저임금까지 말이야. 미안. 통상임금과 마찬가지로 이 글의 목적은 최저임금이 아니므로, 최저임금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꾸나.      




내 생각에 아마도 임금은 희생양이었을 거야. 조금 더 순화해서 표현하자면, 노사정간의 치열한 정치적 합의의 산물이겠지. 임금을 둘러싼 법의 규범력은 이미 누더기가 되어 있어. 

판례에서는 복리후생적 성격의 임금이 없다고 판결했어. 그런데, 최저임금법에서는 이미 파기된 것으로 생각한 복리후생적 성질의 임금이 등장하고 있어.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고 판결했지만, 최저임금법에서는 명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 사실 논리적으로 최저임금법은 임금이분설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여. 임금이분설을 파기했다고 해 놓고서 통상임금에 대한 판례와 최저임금법의 여러 조문에서 임금이분설이 계속 살아있는 듯한, 이 논리적 모순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더 큰 문제는 노사정간 이해관계가 너무 첨예하게 얽혀 있어서, 그 논리적 모순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지경까지 와 버린 거야. 임금은 모순덩어리의 체계 속에서 희생되고 있는 것, 아닐까. 상처 투성이의 왕.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왕, 최저임금. 누구에게도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려온 불운의 왕.    

  

오늘은 삼촌이 조금 감정이 격해진 것 같다. 

실무적인 얘기보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이번 편지에서는 얘기하고 싶었어. 이제 막 인사팀으로  발령받은 네게는 조금 어려운 얘기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도 앞으로 실무를 하면서, 다시 이 편지를 곱씹어 보았으면 좋겠다. 

오늘 편지, 힘들었지? 이쯤에서 끝낼게. 


철학이 없으면 현실도 흔들린다. 


네가 임금에 대한 철학을 다시 한번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다.      


브런치 매거진에 올린 글을 엮어서 "누더기가 된 임금(부크크)"이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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