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의사와의 정신과 상담

by 라봇

베트남에서 상담받을 수 있는 정신과 의사를 찾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외국인이나 한인이 많은 하노이, 호찌민도 아니었고, 관광 도시인 다낭에서 그런 인력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전문 통역사가 여러 명 배치되어 있을 정도로, 다낭은 외국인을 위한 병원 인프라가 괜찮은 편이지만, 전부 내상이나 외상 전문이지 외국인을 위한 정신과 상담 서비스는 없었다. 상식적으로 휴양지에 정신 상담을 받으러 오는 외국인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럼 온라인으로 한국에 있는 의사와 상담을 해볼까 했지만, 내가 찾은 건 단지 글로 연락을 주고받는 상담 정도일 뿐, 얼굴을 보고 얘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찾다 찾다가 그냥 상담받는 걸 포기하고 이대로 지낼까 싶다가도, 계속 방에만 틀어박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인터넷을 뒤졌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영국 상담 회사로, 전문의와 스카이프로 얼굴을 보며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서비스였다.


마음에 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병원에 가도 직접적으로 주사를 맞거나 시술을 하는 것보다, 우선 상담을 통해서 치료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영국에서는 이미 이런 사람들을 위한 온라인 정신과 상담 서비스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의사 역시 자유롭게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며, 어디서든 환자 상담이 가능하니, 그들도 선호하고 있는 방법 같았다. 문제는 의사가 영국인이기에, 상담도 영어로 진행해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영어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 부분이 제일 걱정이었다. 상담으로 치료하는 일인 만큼 내 증상을 올바르게 의사한테 설명하고, 그 의사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게 치료의 핵심이니까.


언어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베트남에 머물면서 전문의에게 상담받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기에, 상담 사이트에 문의 메일을 보냈다. 내 증상을 남기자 바로 전문의와 매칭이 되었는데, ‘폴’이라는 영국인 남자 선생님이었다. 상담은 주로 1회당 50분으로, 상담 비용은 한국돈으로 약 5~6만 원 정도였다. 지불은 페이팔로 했다. 당연히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영국 기준 가격이었고 전문의와의 상담이었기에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오프라인 상담이라면 분명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거너는 내가 상담을 받기로 한 결정이 잘한 선택이라며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본인도 필요한 건 함께 돕겠다고 했다. 그래서 통역을 부탁했다. 여기서 말하는 통역은 영어에서 한국어 통역이 아니다. 영어에서 영어 통역이다.


미국인인 거너의 한국어 실력은 간단한 일상 대화를 할 정도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 일상 회화를 터득했고, 3개월 정도 무료 한국어 대학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지만 시간 관계상 더 오래 하지는 못했기에 딱 그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히 영한 통역은 무리였다.

거너가 한국어를 잘하는 게 아니니, 그럼 내가 영어를 잘하는 거냐는 오해를 받을 때가 있지만, 나는 흔한 토익 시험 한 번 본 적 없고, 하는 일도 영어랑 거의 상관없는 일들만 해왔기 때문에 내 영어 실력도 내세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언어가 100퍼센트 통하는 사이가 아니다. 그래도 만난 기간이 좀 되니 이젠 대충 얘기해도 서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영국인 의사 말을 못 알아들으면, 거너는 그걸 나한테 더 친숙한 미국식 영어와 쉬운 어휘로 바꿔 통역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거라도 어디냐 싶어서 함께 상담에 참여했다.


그렇게 스카이프로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영국인 의사와 상담을 시작했다. 노란 머리의 푸근하게 생긴 아저씨였고, 나를 배려해 말을 천천히 해줬으며, 중간중간 내가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 그때마다 거너가 쉬운 단어로 바꿔 설명해 줬다.


맨 처음 의사가 한 말은, 내 증상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증상으로 아예 ‘포비아’라는 카테고리가 있다고 했다. 물론 그 ‘포비아’의 대상이 되는 건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벌레에 대한 공포증이 심한 사람들은 꽤나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긴 해도 포비아 증상이 나아진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나는 왜 이럴까’라는 자책을 할 필요는 절대 없다고 했다.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호흡법을 알려줬다. 틈 날 때마다 이 호흡을 연습하고, 공포스러운 존재를 마주할 때 소리를 지르기보다는 이 호흡을 먼저 하라고 알려줬다. 그 외에도 내가 포비아를 마주하고 공포심을 이겨내는 법과 거너와의 관계 회복에 관해서도 많은 도움을 줬다. 특히 이 부분은 내가 아닌 거너에게 주로 지침을 내렸다. 예를 들어, 내가 순간의 공포를 이겨내고 소리를 지르지 않거나 차분히 대응했을 때, 그에 마땅한 칭찬을 해준다던가 허그를 한다 등의 긍정적인 리액션을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무엇이 제일 공포스럽고 힘든 지 부정적인 감정을 먼저 꺼내게 하기보다, 현재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긍정적인 감정을 먼저 꺼내려고 했다. 상담을 받으며 차츰 불안했던 감정이 가라앉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차올랐다. 비록 모니터 화면에 대고 얘기하는 온라인에 상담에, 외국인 의사였지만, 분명한 건 내가 베트남에 와서 처음으로 잘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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