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 않은 내 나라 사람

by 라봇

내가 다낭에서 유일하게 알고 지낸 한국인이 한 명 있다. 이렇게 말하면 다낭에 한국인이 별로 없는 것 같지만, 경기도 다낭시라고 불릴 만큼 한국인 관광객은 늘 넘치는 도시고, 관광객뿐만 아니라 다낭에서 일을 하면서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적지 않다. 다낭에서 커피 사업을 하는, 얼굴이 알려진 유명 연예인들도 있고, 고깃집, 떡볶이 집 등 요식업에 종사하시는 분들도 많다. 카지노, 호텔, 건설업 등에서도 한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현지인 다음으로 제일 많은 외국인이 한국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내가 가깝게 지낸 한국인이 별로 없던 이유는, 회사나 학교 등 딱히 속해 있는 집단이 없어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적었고, 설사 우연한 기회로 한국인을 보게 된다 하더라도, 외국까지 나와서 한국인과만 어울린다면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좁아질 것 같아, 의식적으로 피한 것도 있다. 그래도 교류를 하고 지낸 한국인이 딱 한 명 있었는데, 나는 그녀를 ‘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김 선생님을 처음 만난 장소는 ‘다단계 파티’에서였다. 베트남으로 사업 확장을 하러 온 다단계 사업자 ‘요코’씨가 나를 비롯해 다낭에 사는 여러 명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김 선생님도 그곳에 온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래 링크 글 참조)

https://brunch.co.kr/@labot/51

김 선생님은 요코 씨와 직접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고, 요코 씨와 함께 다단계 사업을 해 보려는 베트남 사람이 김 선생님과 오랜 친구였기에, 부탁으로 함께 갔다고 했다.


익숙한 억양이 묻어나는 그녀의 영어 발음을 듣고, 즉시 한국인이라는 걸 눈치채고 말을 걸었다. 오육십 대 정도로 보이는 나이에도 꽃무늬 원피스가 너무 잘 어울리는 김 선생님은 말투 또한 교양과 품위가 넘쳤다. 그동안 다낭에서 별로 친해지고 싶은 한국인은 보지 못했는데, 김 선생님은 무언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또 우연히 선생님의 집이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웠다. 걸어서 10분 거리였던 것이다.


김 선생님은 ‘코이카(KOICA)’라고 부르는 한국국제협력단의 일원으로 베트남에 파견 활동을 나오신 분이었다. 오래전부터 여러 개발도상국을 돌며, 한국과의 상호 교류를 높이고, 현장에서 직접 그 나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살펴보며 의료, 교육, 생활 등 전반적인 부분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계셨다. 다낭에서는 몸이 한 개라는 게 아쉬울 정도로 많은 일을 하고 계셨는데, 기본적으로 대학교에서 한국어 교육을 돕는 봉사활동을 하고, 수업이 없을 때는 학생들 가정방문을 통해,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살펴보고 도움을 줄 방법을 찾고 있었다. 나와 만났을 당시에는 낙후되어 비위생적인 베트남 가정집의 주방을 개조하고자 노력 중이셨다. 같은 코이카 단원인 남편과 함께 오지 않은 게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하노이로 파견되어, 같은 나라에 있지만 따로 떨어져 생활하고 계셨다.


솔직히 말이야 이렇게 쉽게 할 수 있지, 예순 가까운 나이에 낯선 개발도상국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주변에는 은퇴하고 유유자적 편안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분명히 있을 텐데, 이 분은 가족도 없이 혼자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와서 봉사하며 살고 계신 것이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있지만 다 베트남 사람들이니, 그들과 아무리 잘 지내더라도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허전함은 있을 것이다.


또, 코이카는 외교부 산하에 있어 정부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물가 저렴한 개발도상국이라 한들 여유롭게 생활할 수는 없다. 택시비는 부담이고 오토바이는 무서워서 버스를 타고 다니셨고, 일반 마트보다 저렴한 재래시장을 찾아다니셨다. 다낭에도 버스가 있긴 하지만 그 더운 날씨에 에어컨 하나 안 달려있고, 배차 시간도 길며 시간대 딱딱 맞춰 오는 것도 아니다. 한 여름에 40도가 육박하는 더위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건 젊은 사람에게도 힘든 일이다. 김 선생님은 적당한 금액의 원룸, 버스 정류장과 재래시장이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한국인도 거의 없는 우리 동네를 선택하신 것이었다.


식사는 잘하고 계신 지 궁금해서 집에 놀러 가 본 적이 있다. 선생님은 일정이 바쁜 데다 시장에 가도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정말 간단한 채소, 과일 정도만 사서 드시고 계셨다. 나에게도 손님 대접을 해 주겠다며 토마토 주스를 만들어 주신 적이 있는데, 그 안에 개미 시체 여러 마리가 둥둥 떠다녀서 놀란 적이 있다. 원인은 주스 만들 때 섞은 꿀 때문이었다. 꿀 통을 살펴보니 이미 수 백 마리의 개미가 몰려 빠져 죽어 있는 상태였다. 원시가 있으신 선생님 눈에는 그 수많은 개미들이 안 보였던 것이다. 나는 곤충을 먹으면 단백질 섭취에 좋다며 눈을 질끈 감고 꿀꺽꿀꺽 마셨지만, 한 편으로 개미 범벅이 된 꿀을 아무것도 모른 채 먹고 계셨던 선생님이 조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김 선생님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나도 시력이 달라질 정도로 나이들어도 이렇게 활동적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사람인지라 누구든 나중에는 편안한 것, 안정된 것, 익숙한 것에 마음이 기울기 마련인데, 선생님은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 자진해서 혼자 해외 생활을 하고 계셨다. 그것도 은퇴 자금으로 여유롭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렵게 생활하는 외국인들을 자신의 이름이 아닌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으로 돕기 위해서 말이다. 하노이에서 그 뜻에 함께 하고 있다는 선생님의 남편분 얘기까지 들으니, 역시 사람은 같은 그릇을 갖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배우자를 만나야 더 나답게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해야 잘 은퇴하는 걸까 고민하는 사람들 틈에서 이번에는 어떤 도전을 해볼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직접 찾아다니며 행동하는 선생님을 보며, 나이 들어도 이런 삶의 방향도 있다는 선택지가 보여 신선했다. 해외 살이의 장점 중 하나는 그곳에서 익숙하지 않은 내 나라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포함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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