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에서 살며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는 ‘마리에’라는 일본인 친구로, 그녀는 다낭에 있는 여러 어학원에서 일본어 강의를 하고 있었다. 마리에와 매일 같이 만나던 나는, 그녀의 직장 동료들도 전부 알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마리에가 일하던 어학원 중 한 곳은 우리 집에서도 5분 거리라, 수업이 끝날 때쯤 찾아가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하고, 원장님이 직접 학원에서 만들어 주는 베트남 가정식을 얻어먹기도 했다.
마리에는 학원에서 일하는 유일한 원어민 선생님이라, 학생들과 학원장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마리에는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하노이로 이사를 결정했고, 그녀가 갑자기 떠나면서 어학원에는 공석이 생겼다. 갑자기 어디서 원어민 선생님을 구하냐며 발만 동동 굴리던 원장님은 갑자기 내게 연락을 해왔다. 나보고 일본어 수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도 일어를 좀 할 줄 알고 원장님도 일어가 능통했기에, 마리에와 셋이 대화를 할 때는 일어로 얘기하곤 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일본어가 조금 가능한 한국인이고, 원장님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원장님은 홍보를 위해서 우리 학원에는 꼭 ‘외국인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다. 내 국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외국인’이라는 게 중요한 것이다.
보여주기를 중요시하는 베트남에서, 일어를 할 줄 아는 베트남 강사가 있다는 것보다, ‘외국인 선생님’이 있다는 게 더 있어 보인다. 마리에가 갑자기 떠난 마당에, 원장님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외국인은 나였고, 게다가 얼굴만 봤을 때는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구별도 잘 안 되니 활용하기 딱이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내게 부탁한 건지 알기에 거듭 거절했지만, 어느 정도 기초적인 대화가 가능한 성인반만 맡게 해 준다고 했고, 자료준비도 원장님 본인이 해주겠다며 계속해서 제안을 해왔다. 고민 끝에, 그동안 원장님께 받은 호의도 있고 집에서도 가까우니 나가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숨지기 않을 거라는 게 조건이었다.
첫 수업은 원장님이 같이 들어왔다. 나는 그들에게 이름을 소개하고, 준비된 자료를 토대로 일어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어차피 외국인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필요한 문법을 배우고 그걸 토대로 직접 대화 연습을 해보고 싶어 오는 사람이 많아, 수업 시간 동안 대부분은 특정 주제를 가지고 그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이 많았다.
학생들은 처음 보는 내 얼굴에 호기심을 갖고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베트남에 산 지 얼마나 됐는지, 왜 왔는지, 살던 도시 이름은 뭔지. 그들의 질문에 나는 ‘부천’이라는 도시에서 십 년 넘게 살았다고 얘기했는데, 도시 이름을 들은 학생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일본에 그런 도시도 있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원장님은 수업이 진행되기 전까지도 그들에게 내 국적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 부천은 한국에 있는 도시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때 원장님이 말을 가로채며, 우리에게 외국 도시 이름은 전부 생소하게 느껴진다며 말을 돌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한국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던 원장님이 끼어들었고 결국 한국의 ‘한’자도 꺼내지 못 한 채 수업은 끝났다.
원장님은 직접적으로 내게 일본인인척 하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수업 시간에 취하는 태도를 보니, 끝까지 학생들에게 내 국적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원어민과 회화 연습을 하고 싶어서 등록한 학생들일 텐데, 새로 온 선생님이 한국인이라고 하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전부 환불 사태가 일어나고 말 것이다. 한국에서도 원어민 영어 수업이라고 해서 갔는데, 영어 좀 한다는 러시아 국적의 선생님이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닌가.
두 번째 시간부터는 원장님이 함께 하지 않았지만, 학생들도 내게 개인적인 질문을 전혀 하지 않아 한국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없었다. 원장님이 내가 오기 전 학생들에게, 이번 선생님은 사적인 질문받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수업 시간에 쓸 때 없는 질문은 하지 말아 달라고 단속해 둔 게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이 물어보지도 않는 말을 내가 굳이 할 필요는 없으니 나도 잠자코 준비된 자료로만 수업을 진행했다. 원장님도 나도 그들에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학원에 갈 때마다 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이사를 핑계로 관두고 말았다. 그들 대부분이 일본으로 이주, 혹은 취직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미약하나마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이 헛된 시간은 아니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