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가 필요한데 결혼할래?

by 라봇

거너네 회사에 큰 변화가 생겼다. 지점장이 갑자기 퇴사를 하고 근처에 따로 회사를 차려버린 것이다. 본사는 네덜란드 회사지만, 다낭 지점은 지점장이 전부 회사를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회사 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다. 결국 본사 방침과 지점장의 운영 방식이 엇갈리자 그는 퇴사를 결정한 것인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퇴사와 동시에 조금씩 같이 일하던 직원들을 빼내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 똑똑하고 사람 관리 잘하기로 유명해 그를 따르는 직원들이 많았고, 그가 없는 회사보다는 그가 차린 회사로 가길 원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갑자기 긴 연차를 쓰고 잠적하거나, 아니면 유학을 간다고 해 놓고 이직을 하거나 하는 등 각각의 이유는 달랐지만 빠져나간 직원들이 모두 향하는 곳은 지점장의 새로운 회사였다. 당연히 거너의 회사는 일할 사람이 부족해졌고, 한꺼번에 빠져나간 인원을 채우고 가르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며 일거리 자체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때쯤 우리의 베트남 비자도 유효기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영주권이 아니었기에 때가 되면 연장 신청을 해야 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이 됐다. 나는 베트남에 계속 머무는 것도,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나라에 가는 것도 다 괜찮다고 생각하던 상태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는 거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에게도 이직 제안이 왔을 때 대답을 망설였다. 제안을 받아들이면 자동으로 베트남에 더 남기로 결정되는 것인데, 그의 짧지 않은 해외 생활이 발목을 잡았다. 문득 한국과 베트남 생활을 하며, 자기 나라인 미국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직 제안을 거절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도 아니었고, 다른 이직 자리를 찾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일단 결정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 보자던 우리는 평소처럼 일상을 보냈고, 어느덧 비자 연장 신청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거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집에서 김치찌개를 끓여 먹고, 그는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나 요즘에 미국이 그리워. 꼭 가야겠다 그런 건 아니지만, 떠나온 지 좀 돼서 그런가 봐. 그런데 어제 아버지가 좋은 제안을 해왔어.”


거너의 아버지는 은퇴를 하신 후 고향에 작은 집을 사서 임대사업용으로 쓰고 계셨는데, 그 집에 살던 세입자의 계약이 곧 종료된다는 것이었다. 거너가 요즘 미국으로 다시 오고 싶어 한다는 마음을 읽은 아버지는, 만일 네가 돌아온다면 그 집을 저렴하게 임대해 주겠다고 하셨다. 해외 살이를 하면서 당연히 미국에 지낼 곳도 일할 곳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는데, 시세보다 싼 월세로 살 곳을 바로 구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솔깃한 제안이었다. 귀국을 원한다면 일자리를 찾은 후에 해도 늦지 않겠지만, 주소지가 베트남으로 되어 있는 것보다 미국으로 되어 있는 게 그 나라에서 훨씬 취직하기 쉬운 건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그래서 난 베트남 비자를 연장 안 하고 오랜만에 귀국해서 미국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생각 중이야. 넌 어때? 같이 갈래? 네가 미국이 싫다고 하면 나도 굳이 안 가도 돼.”


사실 나는 거너를 만나기 전까지 미국이란 나라에 티끌만큼도 관심이 없었고, 그의 부모님을 만나러 일주일 방문 한 거 외에는, 달리 그 나라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아는 게 없으니 싫고 좋고 말할 것도 없는 상태였기에, 그 나라에서 살아보는 것도 좋은 도전이 될 거라 생각했다.


“미국에서 사는 건 상관없어. 그런데 미국이 베트남처럼 비자 얻기가 쉬운 곳도 아니고. 비자받으려면 알아볼 것도 많고 시간도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내가 바로 미국 가려면 너랑 결혼해야 돼”


“결혼하면 되지.”


그는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며 무심하게 결혼을 말했다.


“그거 지금 프러포즈야?”


“일종의?”


반지랑 꽃은커녕 근사한 식당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는 설거지 거리에 눈을 고정한 채 말하고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나 결혼에 큰 로망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너무 심드렁한 태도로 결혼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무릎이라도 꿇어야 했나?”


내가 말이 없자, 고무장갑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무릎을 반 접는 시늉을 했다.


“사실 반지는 사려고 했는데, 우리가 같이 살며 일상 전체를 공유하다 보니 뭐라 핑계를 대고 혼자 나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내가 반지 보는 센스도 없고. 같이 보석점 가서 네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자.”


그냥 쉽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동안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었다는 말에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 그래서 긍정적인 답을 꺼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이 남자와 결혼 생각도 없이 같이 베트남에 오지도 않았을 거지만, 굳이 결혼하지 않고도 이렇게 함께 지낼 수 있기에, 결혼을 꼭 해야겠다는 조바심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리며 우리는 계속 함께 하기 위해 결혼을 택하게 됐다. 비자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굳이 지금 결혼을 결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자 문제가 결혼 시기를 앞당겨 준 것은 맞는 것 같다. 국제 커플들이 사귀다가 비자 문제로 어영부영 결혼하는 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우리도 그 절차를 그대로 따르게 된 것이다. 이 대화가 있고 일주일 후, 우리는 한국에 혼인 신고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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