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부정』
그동안 절판 상태였던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복복서가)이 개정판 서문(브라이언 그린)을 추가하여 새롭게 출간되었다. (내가 책을 평가하는 기준 중의 하나는 인용된 문헌의 한국어 번역본에 대한 참조를 얼마나 충실하게 하고 있느냐이다. 번역의 정확성 이전에 성실성을 기준으로 판단해보면, 마치 국내에서는 아직 찾을 수 없는 책인양 원저의 인용문을 그대로 번역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그러한 의미에서 노승영 번역본은 미주에서 꼼꼼하게 인용된 문헌의 한국어본의 페이지를 밝히고 있어서 그만큼 신뢰가 간다. 다만, 역자 후기가 없어서 아쉽고, 색인index이 있었더라면 하는 욕심을 내본다.)
어니스트 베커는 내가 기획하고 있는'실존과 영성 그리고 심리 치료'라는 테마의 전당에 뒤늦게 입성한 스타이다. 향후 그의 저작들과 관련 논문에 대한 번역문을 올릴 예정이다.
그의 저서는 고전이지만, 고전이 흔히 그러하듯, 그가 다루는 학제적 탐구와 광범위한 주제가 접근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은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의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생산되었다는 점에서도, 현재적 수용 맥락의 어려움은 분명하다.
책의 제목에서 사용된 내가 이해한 '죽음의 부정'이란 인류가 만들어낸 종교적 의례, 예술, 신화 등의 문화 뿐만 아니라 신념, 사상, 철학을 포함한 제도와 물질 문명 전체이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를 상징 체계 내에 삽입하여 불멸을 약속하는 '영웅적'인 '부정'을 시도하는 존재이다. 이제 그가 입은 두꺼운 '갑옷'은 과도하게 확장되어 웅크려 떨고 있는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 어디서든 도주는 불가능하다. '악'이란 내가 걸친 갑옷이기에.
다음은 어니스트 베커의 사상을 압축 정리한 샘 킨 Sam Keen의 서문의 일부이다.
『죽음의 부정』과 『악으로부터의 도피』에 나타난 베커의 철학은 네 가닥의 끈으로 꼰 수술이다.
첫 번째 가닥. 세상은 끔찍하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자연에 대한 베커의 해석은 월트 디즈니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
두 번째 가닥. 인간 행동의 기본적 동기는 자신의 원초적 불안을 다스리고 죽음의 공포를 부정해야 하는 생물학적 욕구다.
세 번째 가닥. 죽음의 공포가 어찌나 압도적인지 우리는 이 공포를 무의식에 묻어두려 한다....우리가 인격의 방어 기제―빌헬름 라이히가 ‘성격 갑옷’이라고 부르는 것―안에 얌전히 머무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끼며 세상이 만만한 척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가 성격의 방어 요새 안에 웅크리고 있는 동안 삶은 우리에게서 달아난다. 사회는 우리의 타고난 무능력함에 맞서는 두 번째 방어선을 치는데, 그것은 영웅 체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영속적 가치가 있는 일에 동참하여 죽음을 초월한다고 믿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국을 정복하고 신전을 건설하고 책을 쓰고 가족을 이루고 부를 쌓고 발전과 번영에 이바지하고 정보 사회와 전 세계적 자유 시장을 창조하는 일에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가짜 불멸을 얻는다....
(서문, 샘 킨)
이제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배경 맥락을 통해서 에둘러 접근하거나, 그의 사상을 간략하게 요약한 개요를 통해서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직접 어니스트 베커의 정원을 천천히 느리게 걷는 방법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먼저,『죽음의 부정』에서 유래한 주제를 9.11 이후 미국 현대 사회에 적용한 다큐멘터리『죽음으로부터의 탈주 Flight From Death: 불멸을 향한 탐구』(2003)로 에둘러 가 본다.
https://youtu.be/eMla61cOMtc?si=T49DeexhC9jxsShh
이 다큐멘터리는 <어니스트 베커 재단 Ernest Becker Foundation>의 지원으로 Patrick Shen이 연출을 맡아 제작되었다. 출연자들 가운데는 '공포 관리 이론'의 선구자 셸던 솔로몬 Sheldon Solomon, 실존주의 상담 심리의 대가 어빈 얄롬 Irvin D. Yalom, 『죽음의 부정』의 서문을 썼던 샘 킨 Sam Keen 등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죽음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다룬 글 가운데, 가장 『죽음의 부정』의 심리학적 배경 맥락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수 있는 저서로 권석만 선생의『삶을 위한 죽음의 심리학』을 들 수 있다.
위의 책의 3부와 4부 특히 13장은 어니스트 베커의 저서 제목을 차용한 '죽음의 부정: 불멸의 추구'이다.
마지막으로 어니스트 베커에 대한 전기적 약력과 간략한 개요를 통해 그의 사상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는지를 대략적으로 개괄하는 방법이 있다. 위키에 소개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어니스트 베커 재단 Ernest Becker Foundation>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그의 약력과 그와 관련하여 개인적 회고와 감상을 담은 글을 번역해 올린다. 이미지는 내가 삽입했다.
p.s.
가끔 나는 영화를 보면서 내가 알고 있는 장소와 사물들이 나오면 흥분을 하면서 더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그때 그 장소와 사물들은 객관적 대상으로서 스크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속 어딘가로 돌연 들어와 또 다른 시공간Chronotope을 만들어낸다.
<어니스트 베커의 전기적 약력>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드는 동기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어니스트 베커의 지적 삶을 흡수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을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 추구하기로 결심했고, 자신의 탐구를 특정 학문의 경계에 국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문적 경력은 흩어지고 폭풍처럼 몰아쳤다. 1960년 박사 학위를 마친 후 1974년 요절할 때까지 그는 드물고 특이한 깊이의 책과 저널 기사를 꾸준히 집필했다. 이 저작들에서 베커는 인간 조건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찰력을 제공하는 '인문 과학'을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베커는 1924년 9월 매사추세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병으로 복무하며 나치 강제 수용소를 해방시키는 데 도움을 준 군 복무를 마친 후 뉴욕주 시러큐스 대학교 Syracuse University에 입학했다. 졸업 후 그는 행정관으로 파리 주재 미국 대사관에 합류했다. 파리에서 생활한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이 일과 외교단에서의 삶에 대한 전망에 지루함을 느꼈다.
30대 초반에 그는 시러큐스 대학교로 돌아와 문화 인류학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인간 연구에 대한 학제 간 및 문화 간 접근 방식으로 인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베커는 곧 철학적 인류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분야에 그는 그의 열정을 쏟게된다.
시러큐스 대학에서 베커는 일본 전문가 더글라스 해링Douglas Haring 밑에서 공부했다. 베커는 해링의 교수법과 지적 영향력을 크게 평가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인 『선: 이성적 비판』(1961)은 일본의 선(禪), 중국 사상 개혁 및 서양 심리 치료psychotherapy 에서의 전이 메커니즘mechanisms of transference을 탐구한다.
베커는 1960년 봄에 박사 학위를 받고 시러큐스의 업스테이트 메디컬 센터Upstate Medical Center 정신의학과에서 인류학을 가르쳤다. 베커는 그곳에서 정신과 의사 Thomas Szasz와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Szasz는 이미 정신의학의 의학적 모델과 그에 내재된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반권위주의anti-authoritarian 성향을 가진 베커는 Szasz와 그의 서클에 끌렸고 정기적으로 토론 그룹에 참여했다. 동시에 베커는 학교에서 제공되는 다양한 강의와 심포지엄에 참여하여 정신의학의 임상적 측면을 내부에서 알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베커는 정신 질환에 대한 거래적transactional 관점을 옹호하는 논문을 정신의학 저널에 발표했다. 그는 또한 센터에서 정신과 인턴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반영한 두 권의 책 『의미의 탄생과 죽음』(1962/1971)과 『정신의학에서 혁명』 (1964)을 출판했다. 이 저서들은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에 대한 폭넓은 학문적 지식을 보여주지만,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결코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Thomas Szasz 의 견해는 동시대의 정신의학의 관행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 분야의 일부 이해관계와 충돌하게 되었다. 특히 Szasz와 그의 서클의 연구가 정신질환자의 비자발적 헌신 관행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더욱 가열되었다. 1962년 11월, 뉴욕주 정신위생국Department of Mental Hygiene은 주립 의과대학 내에서 사실상 교수직을 박탈당한 Szasz를 징계했다. 베커는 Szasz와 사상적 차이점은 있었지만 주 당국의 검열을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고 그를 지지했다. 인턴 강사로서 베커의 용감한 행동은 결국 큰 대가를 치루게 되었고, 다른 여러 명과 함께 학교에서 해고되었다. 그는 곧 이탈리아에서 1년간의 글쓰기와 성찰을 위해 떠난다. 이제, 그는 남은 10년을 노마드 학자nomadic scholar로서, 거의 매년 직장과 학과를 오가며 보냈다.
로마에서 1년을 보낸 후, 베커는 1964년 학기를 시러규스Syracuse에서 보냈고, 이번에는 의과대학이 아닌 교육 및 사회학과에서 강의했다. 이 무렵, 1960년대 후반을 특징짓는 학생 운동이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베커는 젊은 대학생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고, 나중에 학생운동의 환각제 복용과 관련된 디오니소스적 과잉Dionysian excesses 상태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공개적으로 이러한 민권 운동을 지지했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으며, 권위주의적 교육 관행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 또한 공유했다. 그는 특히 연구 계약을 위해 군 및 비즈니스에서 투자를 찾고 의존하는 대학의 일반적인 관행이 학문적 독립성과 자유에 미치는 위험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학문 연구의 재정적 측면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결국 시러큐스 대학 당국은 1년 후 베커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1965년, 베커는 비슷한 1년 계약으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사회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 그는 인류학과에서 시간 강사로 일했다. 베커의 혁신적인 교수법과 강의는 정기적으로 수백 명의 학생들을 끌어모았다. 그의 강의는 그의 사유체계를 반영했다: 광범위한 학제적 탐구와 혁신적이며, 이론적 형식을 현재의 관심사에 적용하였고, 또한 매우 드라마틱한 연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실존적 인간의 선택과 광기와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 베커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묘사했다. 또한 베커는 강의에 연극 무대의 의상을 입고 와서 소품과 무대 조명을 사용하여 그만의 ‘리어 왕’으로 소통했다.
베커의 교수 방법이 학생들 사이에서 지적 모험의 흥분을 불러일으켰다고 해서 다른 교수진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문학과 신학 자료를 활용하려는 의지와 사회 과학에 대한 좁은 경험적 접근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 때문에, 동료 학자들은 베커를 나이브하고 비과학적인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결국 버클리 대학 당국은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베커의 강의를 유지해 달라는 청원에 서명했다. 이 청원이 실패하고, 학생들은 그의 급여를 학생 기금에서 지급하는 '외래 강사 Visiting Scholar'로 모셔오기로 투표했다. 대학 당국은 베커가 '교육 컨설턴트educational consultant'로 남도록 하는 데 그 기금을 사용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지만, 강사로 고용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 합의에 따라 베커의 수업은 학점 외로만 제공되었다. 대신 베커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에서 사회 심리학을 가르치는 제안을 받았다. 베커는 총장인 S.I. 하야카와Hayakawa가 일반 의미론General Semantics의 학제 간 과학의 핵심 창시자 중 한 명이었을 때부터 이 기관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베커와 같은 광범위한 '제너럴리스트 generalist' 사회 과학자는 분명 그의 지도하에 있는 기관에서 지지를 받는 행정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베커가 교수진에 합류한 바로 그 해(1967-68)에 캠퍼스에서 학생 소요가 일어났다. 로널드 레이건 주지사의 지원을 받은 하야카와는 주방위군에게 질서 유지를 요청했다. 베커는 강의실 밖에서 무장 경찰과 함께 ‘자유’를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69년 베커는 직책에서 사임하고 밴쿠버의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Simon Fraser University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사회학, 인류학, 정치학을 결합한 학제 간 학과에 합류했는데, 이는 베커 같은 학자에게 이상적인 자리였다. 그곳에서 그는 고독에 관한 놀라운 에세이인 『의미의 탄생과 죽음』을 완전하게 수정한 판본을 출판했으며, 그의 걸작인 『죽음의 부정』과 그 속편인 『악에서 벗어나기』도 집필하였다.
이후 『죽음의 부정』은 논픽션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1972년 말, 베커는 대장암 진단을 받고 1974년 3월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어니스트 베커 회고와 감상 Ernest Becker ; A Memoir and an Appreciation」(Keith Helmuth, 2019)
1. 회고
내가 시러큐스 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새로운 학술 서점의 매니저가 되기 1년 전인 1962년에 어니스트 베커는두 번째 책 『의미의 탄생과 죽음』을 출간했다. 어니스트는 1960년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몇 년 동안 그곳에서 교수직을 유지했다.『의미의 탄생과 죽음 :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학제 간 관점』은 사회과학계의 특정 부분에서 찬사를 받았기 때문에 저자를 만나기 전에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어니스트와 그의 아내 마리는 1964년 이탈리아에서 체류를 마치고 돌아왔고, 그 후 시러큐스 북 센터의 단골 고객이 되었다. 특히 그는 연구를 위해 정기적으로 책을 주문하기 위해 왔다. 서점에서 학계 고객들과 친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연구에 관심을 보이는 것다. 어니스트의 작품에는 단순히 관심을 보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제와 관심사가 나와 상당 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또한 그와의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도 금방 깨달았고 아직 탐구하지 못한 지평을 열기 시작했다. 당시 어니스트는 40세, 나는 27세였다.
어니스트의 첫 번째 책 『선: 이성적 비판』은 1961년에 출간되었다. 1964년에는 더 이상 인쇄되지 않았고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이전에 아이오와 대학교 동아시아학 프로그램에서 인도 불교의 중국 전파와 도교가 선불교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미친 영향, 즉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선종이라고 불리게 된 것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공부를 즐겼다. 이 기간 동안 불교 학문도 탐구했지만 집단 명상의 퀘이커 수행에 익숙했기 때문에 선종 수행의 개인주의적 초점과 그 한계에 대해 비교하면서 알게 되었다.
1963년까지 나는 1차, 2차 불교 문학에 대해 관심 있는 만큼 많이 읽었지만 어니스트의 책 부제는 '이성적 비판'이었다. 나는 그에게 이 책에 대해 물었고 왜 더 이상 구할 수 없는지 물었다. 그는 이제 책이 부끄러워서 재판을 찍어내는데 반대했다고 말했다. 그는 내용이나 분석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취한 어조때문에, 이제 책이 유통망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여기서 이러한 자기 비판은 어니스트 베커를 이례적이고 엄청나게 매력적인 학자이자 교사로 만든 특징 중 하나이다. 그의 일과 삶은 지속적인 자기 비판과 학습에 대한 개방성의 궤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는 '인간 문제'에 대한 분석을 정교하고 심화하면서 이전 사고와 이해의 단점을 지적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어니스트는 계몽주의의 전통에 헌신했지만, 그 인류학의 진보적인 추진력은 20세기 납골당으로서의 역사 charnel house history는 물론 지난 세기의 끔찍한 폭력적 사건들로 인해 그에게 깊이 완화되었다. 그가 계몽주의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베트남에서의 전쟁은 점점 더 역겨운 양상으로 격화되고 있었다. 인간 행동의 사악한 결과는 계몽주의의 비전에 거짓을 안겨준 끝없는 역사의 퍼레이드처럼 보였다. 이것이 바로 당시 어니스트 베커에게는 인간 문화의 수수께끼였다. 그는 그의 인격과 헌신의 중심에 지적 정직성, 분석적 직관, 인류에 대한 깊은 관심을 품고 있었다.
어니스트 베커의 문화 인류학 기초는 그가 "인간의 과학"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학제 간 구조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인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플랫폼이었다.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1725)의 선견지명 있는 『새로운 학문』으로 돌아가 풍부하고 다양한 계몽주의 관찰과 사회적 사고를 탐구하고,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공포를 탐구하며 다윈, 마르크스, 프로이트를 넘어 막스 셸러의 뛰어난 사회학, 오토 랑크의 심리역학적 통찰,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의 실용주의적 실재론, 폴 틸리히의 심층 신학depth theology 등을 고찰했다. 어니스트 베커는 이전에 달성되지 않았던 사회 심리학과 인간 사회 및 문화 발전의 종합을 발전시켰다. 이는 스승 어니스트가 남긴 지적 및 분석적 유산의 짧은 목록일 뿐이며, 그 유산에는 그가 그린 "인간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그려져 있다.
"인간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대부분 인간 집단이 끔찍하게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방식으로 세계사적 차원의 역사적 유혈 사태, 사회-정치적 재앙을 초래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어니스트는 지적으로 만족스러운 진리를 찾는 상아탑 학자가 아니라 "인간 문제"에 대한 매우 불편한 진리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고 이 증거를 수집함으로써 관련된 행동 문제의 최악의 영향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통찰력을 추구한 일종의 최전선 심리사회적 및 문화적 고고학자였다. 그의 연구와 학제 간 분석은 이 불편한 진리를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방식으로 조립했다. 그는 인간이 개인과 집단 모두에서 왜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심각하고 종종 치명적인 갈등에 빠지게 되는지에 대한 고도로 일관된 심층 인식의 렌즈 역할을 하는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이전에 어니스트가 인간 갈등, 침략, 복수, 그리고 확장하는 악을 해결하는 데 기여한 것을 언급할 때 "개선하다 ameliorate"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해결하다solve"라는 단어는 순간적으로 떠올랐겠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단어는 어니스트가 쇠퇴diminishment와 죽음에 대한 영웅적인 문화적 방어가 얼마나 노골적이고 은밀하게 악행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평가의 맥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니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나치 강제 수용소를 해방시키는 데 도움을 준 미국 보병이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목격했다. 그의 탐구에는 눈먼 자blinders가 없다.
그의 마지막 책 제목은 『악에서 벗어나기』지만, 어니스트는 인간의 전망에 대해 점점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두 번째 저서인 『죽음의 부정』에서 자신이 작업해 온 모든 합성의 가닥을 모아 자신의 작업이 이끄는 이해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1974년 49세의 나이로 대장암으로 사망했을 때 『악에서 벗어나기』원고는 폐기된 상태였다. 그는 이 원고가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았고 결국 더 이상 연구할 에너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다듬어진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 그의 부인 마리는 어니스트가 자신의 최종 평가가 알려지지 않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후에 책이 출판되도록 했다.
시러큐스에 있는 동안 어니스트는 정신분석학과 정신의학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철학적 인류학에 포함시켰다. 1964년 그는 『정신의학에서 혁명 :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 Revolution in Psychiatry: The New Understanding of Man』을 출판하여 인간의 기능과 오작동에 대한 프로이트 이후의 이해를 발전시켰다. 그는 왜 "정신 질환"이 단순히 의학적 문제로 정의될 수 없으며, 사회적 및 문화적 맥락에서 개인 발달의 전체 범위와 연관되어 있는지 보여주었다.
시러큐스에서 우리의 이별은 컸지만, 그는 자신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1965년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에서 교수직에 나섰다. 그의 선택은 베트남 전쟁 반대와 언론 자유를 위한 학생 운동이 한창인 시기에 선택한 일이었으며, 시위와 운동들은 대학의 권위주의적 구조를 위협하는 학생 봉기로 변화하고 있었다. 어니스트는 대학 교육과정과 행정 변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편에 섰다. 결국 그의 교수직 임명은 갱신되지 않았다.
2,000명의 학생들이 그의 유지를 위한 청원서에 서명했다. 대학 관리자들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그들은 학생 자금의 투입으로 그의 급여를 지급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대학은 동의했지만, 그의 강의는 학점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그가 훌륭한 교사이며, 어쨌든 우리는 그 강의를 수강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니스트가 지원에 감사한 만큼, 그는 S. I. 하야카와Hayakawa가 총장이 된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의 직책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하야카와는 알프레드 코르즈브스키Alfred Korzbski의 뒤를 이어 커뮤니케이션 및 미디어 연구에서 일반 의미론General Semantics 분야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어니스트가 친화력을 가지고 있던 최전선이었던 frontline 학문과 문화 분석 운동의 일환이었다.
3년 후, SFSU는 학생들의 항의와 건물 점거로 폭발했다. 하야카와는 주방위군을 소집했고 캠퍼스는 권위주의적 억압의 무장 캠프가 되었다. 이곳은 어니스트가 수용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이 아니었다. 1969년, 그는 밴쿠버에 있는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 Simon Fraser University의 학제 간 프로그램 과정에 채용되어 남은 직장 생활을 행복하게 보냈다.
이 모든 사회적 격변과 직업적 혼란 속에서 어니스트 베커는 내가 읽은 교육에 관한 최고의 책 중 하나를 출간했다. 1967년에 출간된 『소외를 넘어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위한 교육 철학 Beyond Alienation: A Philosophy of Education for the Crisis of Democracy』이다. 7년 전, 폴 굿맨Paul Goodman은 『부조리의 성장 : 조직 사회에서 청소년의 문제 Growing Up Absurd: The Problems of Youth in the Organized Society』라는 책을 출간하여 학생과 교사의 삶과 완전한 인간 발달에 관련된 대안 교육 환경을 위한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소외를 넘어 고등 교육의 세계로 분석과 처방을 확장했다.
1968년 어니스트는 시라큐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몇 년 동안 작업해 온 책 『악의 구조: 통합적 인간 과학에 관한 에세이 The Structure of Evil: An Essay on the Unification of the Science of Man』를 출간했다. 폴 틸리히의 3권으로 구성된 체계적 신학을 처음 본 것은 시라큐스 북 센터에서 어니스트를 위해 주문했을 때였기 때문에 이 기나긴 잉태의 과정을 알고 있었다. 신학이 그의 연구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궁금했고 틸리히 책을 집어 들었을 때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악의 구조'에 명시된 사고의 조직을 예고하는 일련의 대화의 시작이었다. 틸리히는 이 책에서 중요한 저자로 등장한다.
내가 그를 위해 책을 계속 주문하면서 그가 공부에 포함시키고 있는 학문의 범위를 볼 수 있었고, 내가 그에게 흥미를 가질 만한 새로운 책들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작업과 관련한 설득력 있는 책들이 서점에 있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이것이 서점 매니저들이 하는 일이다. 어느 날 저녁, 내가 한 손님 때문에 바쁠 때 그가 서점에 들어와서 역사 섹션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그를 보지 못해서 말할 짬이 생겼을 때, 그에게 인사를 하며 "당신 지금 무엇 하고 있었습니까, 어니? What kick are you on now, Ernie"라고 물었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키가 컸다) 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키스, 나는 '킥'을 안 하지."라고 말했다. 당연히 나는 부주의하게 말을 했기 때문에 대화를 적절한 수준으로 되돌리기 위해 자기 질책이 필요했다. 그가 죽은 후, 나는 그의 부인 마리에게 이 작은 일화를 편지로 썼다. 이 일화는 그가 자신의 작업을 얼마나 진지하게 여겼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던 1973년, 그의 이전 작품을 바탕으로 '인간 문제'에 대한 완전히 완화된 명료한 rounded articulation서술을 담은 책이 출간되었다. 『죽음의 부정』은 이후로 나만의 닫힐 수 없게 열려 있는 마음속의 문이 되는 책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의 중심이 되는 분석적 설명력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니스트가 지적 역사와 문화 서사의 대가이기 때문에 이를 인간 발전의 일관된 이야기로 종합한 것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널리 검토되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기뻐하면서도, 책이 만들어내는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 오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가졌다. 이 책은 어니스트가 사망한 지 두 달 후인 197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의 글 어딘가에서 - 현재로서는 직접 인용할 수 없다 - 어니스트 베커는 우리 시대의 독특한 점 중 하나가 이제 과학 안에서 종교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를 포함하지 않고는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의 과학science of man", 즉 인간에 대한 과학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작품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종교는 죽음을 부정하고 문화적 지배를 주장하려는 시도 속에서 형성된 구성 요소 중 하나이며, 따라서 종종 악한 방식에 빠지기도 하지만, 인간이 많은 갈등, 공격, 폭력, 억압의 원인인 문화적 분위기를 버릴 수 있는 우주적 경험의 차원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다.
2. 감상
이 회고의 나머지 부분은 "인간 문제"에 대한 어니스트 베커의 통찰의 핵심을 스케치한 것이다. 몇 가지 의견을 덧붙인다.
인간 동물로서 우리는 1)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신경계를 가지고 있다. 2)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즉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3) 우리의 존재가 종말을 맞이할 것임을 인식하고, 다가오는 죽음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키에르케고르에 이어 어니스트 베커는 이러한 인식 수준이 경외감과 공포로 이어진다고 관찰한다. 이 놀라운 세계에 살고 있는 순수한 경이로움에 대한 경외감,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라는 전망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우리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이유로 죽음이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할 수 없는 정신역학적 갈등과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행동이 "인간 문제"의 핵심이다.
우리 자신의 죽음과 그 시기의 불확실성에 대한 인식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의식의 최전선에서 죽음을 견디며 살아갈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기껏해야 우울하고 최악의 경우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살 길이 없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순간, 평소의 실존적 불안감을 안고 있는 어른을 캐릭터로 우디 앨런이 연기하는 영화가 있다. 초등학생 시절, 그는 결국 태양이 타버릴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과학 과제를 하지 않으려 한다. 관객인 우리 모두 그 이야기에서 웃었지만, 논리가 곧바로 태양계 안에서 우리의 짧은 궤적인 삶의 순간으로 전달되기 시작하면서 전율을 느낀다. 다행히도(또는 생물권에는 불행하게도) 인간 종은 자기 인식뿐만 아니라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복잡한 신경계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 즉 문화라고 부르는 전략을 개발해 왔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몇 페이지 분량의 간단한 관찰을 기술했다: 생명체는 계속 살고 싶어한다. 이는 매우 간단하고 기초적인 내용이다. 그런 다음 생물은 다양한 적응을 통해 계속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 그리고 여기서 정말 흥미로워진다: 인류는 이러한 진화 과정에 참여하면서 상징적 문화와 물질적 문화를 모두 만들어냈다. 문화적 구성은 인간의 집단화를 통해 집단이 계속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다.(물론 예를 들어 비버도 물질적 문화를 만들어내는 훌륭한 일을 한다).
인간을 차별화하는 것은 자기 인식을 생성할 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추론과 상징적 표현을 통해 실제가 아닌 것을 상상하고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신경계이다. 이러한 신경학적 능력의 한 형태는 오래 전 비버가 수로가 막히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게 만든 다음 막대기와 진흙으로 실험하여 실현할 수 있는지 확인하게 만든 것일 수 있다.
어쩌면 매우 똑똑한 비버가 서식지 혼잡과 자원 고갈에 대응하기 위해 작은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 댐을 건설했을지도 모른다. 또는 비버의 문화의 발전은 반대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비버 댐과 주택 문화가 잘 정착되어 있었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싶지 않은 몇몇 캐릭터가 강, 연못, 호수의 둑에 구멍을 파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또는 비버 문화의 두 가지 방식이 함께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버는 모두 고유한 문화를 가진 똑똑한 생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향쥐들Muskrats 은 같은 집과 둑쌓기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댐을 건설하지는 않았으니까.
인간 공동체는 동일한 진화론적 천에서 단절되어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추상적인 추론과 상징적 이미지는 비버와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일반적인 적응 패턴은 우리가 계속 살고자 하는 욕구를 뒷받침한다. 어쨌든 우리의 놀라운 인식, 추상화, 상징적 표현력 덕분에 우리는 문화적 구성을 통해 저항하고, 부정하고, 재치 있게 행동하고,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비버에 관한 이 비유는 어니스트가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이다.)
분명히 이것이 많은 상징 문화와 물질 문화의 큰 부분이다. 인간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강력한 추진력을 얻고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물리적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우주적 서사나 매우 복잡한 물질 문화가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왜 일부 인간 집단은 이렇게 엄청나게 복잡한 상징 문화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위험할 정도로 과도하게 건설되고 서식지를 파괴하는 형태의 물질 문화를 가지고 있을까? 왜 이러한 영적 및 물질적 확대 경향이 있는 걸까? 왜 이러한 문화는 수익률 감소와 사회적 붕괴를 초래할 정도로 과도하게 발전하는 걸까? (조셉 테인터Joseph Tainter의 『복잡 사회의 붕괴』 참조)
어니스트 베커의 증거와 분석에서 비롯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침묵시키고 죽음을 부정하는 상징적 및 물질적 문화 형태를 확립하려는 거의 보편적인 인간의 노력이다. 이는 "인간 문제"의 이야기를 더욱 왜곡한 것이다. 죽음을 인식하게 하는 놀랍도록 복잡하고 지능적인 신경계는 이러한 인식으로는 살 수 없다. 따라서 그 탁월함, 지능, 독창성은 죽음의 현실을 가리고, 좌절시키고, 부정하는 정교하고 영웅적인 문화 형태를 구축하는 상쇄 노력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영웅적인 문화 형태가 특정 인간 사회에 대해 점점 더 독특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정의되면서, 그들은 의미에 투자하고 공동체 내에서 깊은 심령적 정렬을 제공하며, 진실의 개념을 자신의 이야기의 힘과 보안으로 채운다.
그러나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 상징적이고 물질적인 문화의 형태로 얼마나 정교하게 묘사되든, 죽음에 대한 해결할 수 없는 인식은 끊임없이 그 지배와 지배의 외관을 위협한다. 따라서 죽음을 부정하려는 노력은 그 이야기와 사회적, 문화적 세계가 그 의미를 잃지 않도록 하는 영웅적인 형태와 행동에 대한 판돈을 계속해서 높여야 한다.
소승 불교 Hinayana Buddhism에서 우주 신화의 거대한 정교함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다양한 일신교 서사와 마찬가지로 상징적 사고의 힘에서 비롯된 영웅적인 문화 구성의 좋은 예이다. 샤머니즘 사회와 애니미즘 사회는 이러한 이야기 전개의 자체 버전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문화적 궤적의 각도가 일반적으로 아브라함을 시조로 두고 있는 세 종교(유대, 기독교, 이슬람)의 특징인 포위 심리siege mentality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올더스 헉슬리의 마지막 소설인 『아일랜드』는 인간 신경 기능의 이러한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고 창의적이고 양성적이며 생태적으로 건전한 사회가 형성될 수 있는지 탐구한다.)
물질 문화의 영역에서 죽음에 대한 영웅적인 방어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가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가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모든 기념비적인 건물은 유기적 과정의 세계 위에서 인간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전쟁을 일으키는 무기의 진화, 지리적 및 상업적 제국의 창설, 부의 축적에 대한 열광, 유전 공학, 유틸리티와 보안을 훨씬 뛰어넘는 산업 소비자 경제의 성장 등은 모두 죽음의 지배라는 현실을 감추려는 물질적 형태이다.
물질적 문화 발전의 많은 측면은 진정으로 유용하며 인간의 향상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다른 측면들은 과장, 억압, 폭력, 지배의 규모로 밀려날 때, 죽음을 초월하려는 시도로 상징적이고 물질적인 문화의 영웅 시스템을 구축하는 이야기 외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러한 영웅 문화 시스템은 우리가 실제로 동물이 아니며, 같은 목적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의 마법적 사고와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이 동물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존재의 질서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무엇을 구축했는지 보자; 우리가 어떤 권력과 부를 명령하는지; 실제로 다른 영웅 시스템, 즉 형이상학적 및 물질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다른 사회와 문화에 죽음을 명령하고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확인해보자.
그래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다양한 문화가 등장한 세계의 무대에 서게 된다. 각각의 문화는 안전과 의미를 제공한다. 안전은 상징적이면서도 물질적이며, 좋은 우주 이야기이자 건설된 환경이며, 삶의 수단과 위험에 대한 방어 수단에 대한 접근성도 갖추고 있다. 그 의미는 주로 사회적이며, 공동체의 삶에서 스스로를 검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 세계의 문화 집단이 인구가 적고,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집에 머무는 것을 선호한다면 이러한 묘사는 멋졌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인구는 대규모로 증가했고, 문화 집단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다양한 이유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집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의 영웅 시스템은 종종 불안정하기 때문에 보수와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이러한 업그레이드는 특히 한 문화 구성이 다른 문화 구성과 충돌하고 지배 또는 축소가 문제가 될 때 종종 과장으로 변한다. 이를 "문명의 충돌"이라고 한다. 과장은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 우월성을 주장하고, 부의 축적을 증가시키며, 군사적 대비를 강화하고, 폭력적인 행동의 수용성을 높이며, 서로 다른 사람들을 폄하하고, 희생양이 되며, 노골적인 공격성을 띠는 형태를 취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범죄 당사자를 박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악행의 생성적 맥락에 도달하게 되며, "인간 문제"라는 퍼즐의 또 다른 조각이 맞아떨어진다.
어니스트 베커가 보기에 이것은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형태의 악은 경쟁하는 영웅 시스템의 충돌로 인해 경쟁 당사자 중 한 명이 줄어들거나 파괴될 위협을 받을 때 나타난다. 대안적이고 개선적인 입장을 모색하는 것은 문화적 갑옷이 어떻게, 왜 구축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어니스트 베커의 작업 궤적과 그가 도달한 이해는 이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지만, 그는 자신이 "인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고 상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그는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는데, 우리가 집단적으로 충분히 현명하다면 문화가 혼합되고 종종 나쁜 결과를 낳으며 쌓아온 상징적이고 물질적인 영웅 시스템을 "다시 읽고", 인간 프로젝트의 이야기 제작 과정을 새로운 종류의 지침으로 재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들의 집과 같은 생물권에서 인간 동물에 대한 명확한 시각에서 새로운 방향이 나올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똑똑하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적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새로운 방향은 피해를 줄이고 상호 이익이 되는 자제심을 쌓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파리 기후 협정과 같은?) 이러한 새로운 시작은 문화적 갑옷을 완화하고 존중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존중이 시작될 수 있다면 연민과 공정한 대우가 뒤따를 수 있다.
별거 아니지만 겸손하게 행동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문화 갑옷을 과도하게 개발한 것이 우리 종을 자멸의 위기에 빠뜨린 것이다. 여기까지 가져온 이야기를 기록하고 새로운 종류의 지침을 재구성하며 현재 지구 생태계의 서식 가능성을 밝혀내고 있는 물질 문화의 많은 부분을 재설계하고 재건해야 한다면, 이 작업에 신중하고 겸손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문화의 역학에 대한 통찰력이 향상되더라도 어니스트 베커는 사회가 세상의 악행을 크게 줄일 수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낙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부정'이 어떻게 좋은 삶의 기회를 훼손하는지에 대한 더 나은 이해가 확산되고 유기적 세계의 현실에 겸허하게 기반한 새로운 문화 발전 이니셔티브가 등장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