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유주얼 서스펙트(1996)
* 본 감상평에는 <유주얼 서스펙트>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반전(反轉)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길이길이 회자될 <유주얼 서스펙트>.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악의 화신 '카이저 소제' 또한 영화의 명성과 함께 기억될 강렬한 캐릭터이다. 영화에서 그가 내뱉은 "악마가 벌인 최대의 속임수는, 바로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상이 확신하게 한 겁니다"라는 말처럼, 그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지만 분명히 실존하고 있는 악마이다. 모든 상황을 통제하며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자신이 짜 놓은 판에 직접 뛰어들어 그 순조로움을 즐기는 악마.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는 그렇게 카이저 소제가 유희를 즐기는 모습을 서늘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영화는 캘리포니아 산 페드로의 항구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와 헝가리의 갱단, 그리고 미국의 전과자들이 연루된 이 사건의 경위를 알고 있는 유일한 목격자는 절름발이인 버벌 킨트이다. 형사 데이브 쿠얀은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는 카이저 소제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보석 출감이 2시간 남은 버벌을 형사 사무실에서 심문한다. 버벌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쿠얀에게 설명하고, 쿠얀은 버벌의 진술을 바탕으로 카이저 소제는 전과자 중 한 명이었던 딘 키튼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출감 시간이 되어 버벌이 경찰서를 떠난 후, 쿠얀은 버벌이 사무실 게시판에 있던 이름들을 바탕으로 진술을 거짓으로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리를 절며 경찰서를 나선 버벌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담배를 피우며 그의 진술 속에서 묘사한 카이저 소제의 심복 '고바야시'와 함께 사라진다.
버벌은 카이저 소제이다. 그가 쿠얀에게 했던 진술에는 거짓과 진실이 섞여 있지만, 그가 절름발인 척 연기를 하며 키튼 일당과 함께 했던 것과, 산 페드로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카이저 소제는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고 자신의 이름을 사칭하기까지 한 아투로 마케즈를 처단하기 위해 산 페드로 사건을 계획하였으며, 이 응징의 무대에 아르헨티나와 헝가리의 갱단, 그리고 키튼 일당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모든 '들러리'들은 카이저 소제가 자신의 유희를 위해 만든 종이배에 불과했다. 복수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면 젖어서 가라앉아버릴 종이배.
쿠얀도 카이저 소제가 만든 또 다른 종이배에 불과했다. 카이저 소제는 절대 경찰에 잡히지 않을 위치에 군림하고 있다. 뉴욕 시장, 경찰서장, 심지어 주지사까지 카이저 소제의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찰서에서 쿠얀에게 거짓진술을 하면서 2시간을 보낸다. 자신의 추리가 정답인 것처럼 확신하는 형사를 눈 앞에서 조롱하며 또 다른 유희를 즐긴 것이다. 중간중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상황을 충분히 즐긴 뒤, 카이저 소제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카이저 소제는 앞으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계속해서 종이배를 띄울 것이다. 종이배들의 고뇌와 두려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불현듯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도 깊은 어둠 속에서 매일 종이배를 만들고 있는 악의 화신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는 서늘한 반전의 재미와 함께,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악마의 속임수를 경계하라는 메시지도 함께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