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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 Apr 27. 2020

메모광, 아무튼 메모

'아무렇게나 살고 싶지 않아서'


상실의  고통이 시작된다.
오늘 하루가 날아간 것 같다.

-아무튼, 메모-
 26쪽

기억을 날린 그녀의 고통처럼

하루를 날린 것 같은 나도 고통스럽다.


육아로 살림으로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지난다. '상실의 고통'으로 허한 마음을 채워 보려

가계부 쓰듯 하루 일과를 메모한다.

소위 말하는 시간 가계부다.

남들처럼 시간관리의 효율을 위해 쓰기보다

내가 '살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함이다.




국어시간이었던가 문학시간이었던가 메모광이라는 수필을 읽은/배운 기억이 난다.

작품에 대한 진정한 감상보다는

시험을 치르기 위한 입시위주 교육이었다.

그래도 문학을 배울 땐,

가끔 내게 감흥이 오는 시간들이 있었다. 

'메모광'이라는 짧은 수필 한 편.

메모를 말해주던 그 글이 나는 즐거웠다.

아무튼, 메모/ 정혜윤

'아무튼, 메모' (정혜윤 작)


그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준 제목.


메모라면 나도 어마어마한 메모 부자라서

제목부터 표지부터 필이 꽂힌 책.


항상 메모해왔다는 건,

스스로 정의하지는 못했더라도

뭔가 내 안에 숭고한 메모 철학이 존재한다는 근거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작가님의 통찰과 언어가 잔뜩 기대되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한 나의 작심을 무너뜨리고 책 한 권을 또 사들인다.

아무튼, 메모라는데 사야 하지 않겠는가.


코로나로 육아에 질렸던 그 시간들,

놓지 말아야 할 것은 독서였고

내가 제일 먼저 놔 버린 것도 독서였다.

독서의 맥이 뚝 끊겨진 시점에

삶은 팍팍하고 건조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파묻고 책에 흠뻑 빠져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몰입.


 '아무렇게나 살고 싶지 않아서'라는 말을 작가의 목소리로 들을 때, 메모에 대한 나의 집착이 비로소 해명된다.


꿈이 있을 땐 꿈꾸느라

꿈을 없을 땐 한탄하고 징징대느라

무력할 땐 힘내 보려고

기분이 붕 뜰 땐 침착해지려고.

많이도 끄적대고 살았다.

돌아보면 끼적이던 모든 순간은

아무렇게나 살고 싶지 않은 나의 진심과 함께였다.

아무렇게나 살고 싶지 않았던 몸부림이

내겐 메모였다.


열정적으로 굵은 줄을 쳐가며

이것저것 적어 대며

마치 작가를 앞에 모셔 두고 북토크라도 하듯

무례한 열혈 독자가 되어 읽어나간다.

독서를 너무 오랜 쉰 탓에 해갈이 요란스러운 건지, 내가 진짜 메모광이었던 건지.


여섯 살 아들을 곁에 두고

공룡 스토리와 자모의 한글 세계에서 심히 권태롭던 나는, 비로소 즐거워졌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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