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를 예쁘게 꾸미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뚱뚱한 사람이 개의치 않고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는 당당함이 멋지다.
나를 보는 잣대와 타인을 보는 잣대의 괴리.
후진 자존감이다. 딱하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학교 규정은 귀밑 1.5센티였고,
깡말랐던 나는 더 깡말라 보여야 했다.
하필 내 머리는 반곱슬이었다.
어느 한쪽이항상 밖으로 홀라당 뒤집히고 뻗쳤다.
단발머리를 덜렁거리며 꽤 두꺼운 안경까지 쓴 채로, 바로 옆에 남중을 끼고 있던 여중을 꼬박 3년을 다녔다.
아침마다 밖으로 뻗은 머리를 쥐어 뜯듯 안으로 말아 넣으며 내 인생에는 신경질이 조금씩 쌓여갔다.
그때 우리 반에는 '공주님'이 있었다.
공주병을 제대로 앓고 있던 그녀.
그 친구는 예쁜 옷을 입었고
늘 예쁘게 앉아 있었으며
심지어 펜 하나도 노트 한 권도 예쁜 것만 썼다. 우리는 그 친구를 공주병이라고 놀렸지만
그 친구는 왕따가 되거나 미움받지 않았다.
오히려 귀여움과 사랑을 받았고,
그녀가 사용하는 물건들과 입고 꾸미는 것들은 모두의 관심사가 되곤 했다.
우리 반의 연예인이었다고 할까.
그녀가 예쁜 척을 하는 건지 예쁜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타공인 공주님이었다.
문득 생각난 어린 시절의 그녀.
그런데 명료하게 기억하는 그 친구의 얼굴은
사실 객관적으로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피부가 매끈한 것도 아니었고
그녀 역시 여드름을 드문드문 달고 살았으며,
몸은 늘씬하기는커녕
키가 작아 몸매랄 것도 사실 없었다.
그 애가 대단했던 건,
스스로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자신감
(혹은 착각이었을지라도 뭐 어떤가)과
그 자신감을 말로 행동으로 물건으로 옷으로 표현하고 스스로 만끽하는 데 있었던 거다.
대단한 삶의 기술이며, 그 기술은 모두에게 통했다. 물론 싸가지(?)도 충분히 있었고,
뭔가 매력도 귀여움도 있었기에
왕따가 아닌 공주님으로 등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예인처럼 얼굴이 깨끗하고 예뻐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니 내 눈에 그닥 예쁘지 않은 누군가가 연예를 하고 결혼을 하면 나는 그 연애와 그 결혼에 결핍이 있다고 느꼈다.
예뻐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연애도 결혼도 못할 뻔한 나는, 스트레스와 피로로 피부 트러블이 절정일 때 남편을 만났고, 돈 들인 피부관리에도 실패한 채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최고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그 날에도 예쁘지 못했던 나는 그렇게 삐딱한 시선을 스스로에게 거두지 못했다. 예쁨에 대한 환상을 내가 가진 조건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나는 환상과 현실의 어마어마한 괴리 속에 살며, 늘 예쁘지 않게 살고 존재했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우리 반 공주님이었던 그녀가 생각이 난 건,
그녀를 볼 수 있는 나름의 통찰이
조금 생겨난덕일 거다. 예쁘지 않은 자들의 예쁨을 오래도록 관찰하고 선망하며 살다 보니 이제는 그게 무언지 조금 보이는 것 같다.오해가 이해로 옮겨가는 시점에서 그녀가 떠오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