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어느 날, 내가 좋아하는 페이스북 친구가 폴란드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의 시 "Love at First Sight"을 소개했다. 그당시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어안이 벙벙하게 사랑에 빠졌던 시기였는데, 바로 아래 이 문구가 가슴에 딱 와 닿았다.
운명의 책은 중간에서부터 펼쳐진다
사랑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 다 마찬가지겠지.
소설에서 쭈욱 복선이 깔리다가 사건이 벌어지는 것처럼, 실제 삶에서도 본인들이 느끼지 못하던 복선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다가 어느 순간 문이 열리듯 모든 것이 진행되는 것이니까. 스티브 잡스는 그걸 "인생의 점 연결하기(connect the dots)"라고 했던가? 미래에 어떤 점과 연결될지는 알 수 없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그때 찍었던 그 점이 지금 어디에 연결되었는지 볼 수 있다는 것.
아이를 키우면서 많이 느꼈고, 삶의 여러 굴곡들을 넘어서면서 늘 느끼는 이 인생의 놀라운 것들은 끊임 없이 이어졌다. 인생은 역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늘 정진하였던 것들의 결과가 계획과 상관없이 뜻하지 않는 모습으로 끝에 나타나곤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경이로웠다!
아이가 학원에서 에세이 수업을 듣기 시작하던 날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하지만 그걸 만났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상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잠깐의 마주침이 한 다섯 번쯤 되었을까? 간단한 인사 이외에는 나눠본 적이 없으면서도 늘 존경하였고,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나와 직접 연결될 일은 평생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학부모였고, 그는 아이의 멘토 선생님이셨으니까... 항상 한결같은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었고, 아이가 겪어가는 사춘기 시절에 큰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으며, 아이에게 조언을 주는 순간에 그것을 조언이라고 느끼지 못할 만큼 편하게 다가가 주었다. 한 번도 권위적인 적이 없었고, 소탈하고 진실되었다. 남다른 사랑을 보여주며, 심지어 아이가 이태리 교환학생 하던 시절, 그곳에 찾아가 본인의 관광이 아니라, 친부모처럼 아이 수업 끝날 때 맞춰 가서 밥 사 먹이고 얘기 나누고, 그렇게 영혼을 채워주던 그에 대해 나는 감사를 넘어선 감동을 느꼈다.
스카이프를 통해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멀리서 구경하듯 바라봤던 내게 있어서, 그는 티브이에 나오는 유명인 같이 느껴졌다. 연예인에는 관심 없던 내게 있어서 그는 그저 박식하고 올곧은, 그러나 인간미가 있는 어느 잘생긴 교수님 같았다고 할까? 그저, "아, 멋지다" 하는 느낌에다가, 무한한 존경심... 그리고 나와 상당히 비슷한 교육관으로 인해 우리 딸아이에게 몰입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음에 감사하는 수준...
어느 순간 그와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어쩌면 그 긴 세월 동안 서로가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가졌던 경외심이 차곡차곡 쌓여가서 가능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몇 번의 짧은 인사를 통한 강렬한 인상이라거나, 아이를 통해서 전해 들은 성향, 됨됨이 등이 보이지 않게 작용하였을 거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결코 갑작스러운 감정의 움직임만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 깊은 신뢰 속에서, 본인들조차 모르고 있던 설렘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쉼보르카의 시에서처럼...
내 글 보관함의 거의 맨 아래쪽에 잠자고 있던 이 글을 발견하면서, 게으르게 방치했던 글들을 다시 점검하고는, 이 글을 서문으로 해서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브런치북으로 발행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발행을 계획하고 적은 글들이 아니어서 순서도 뒤죽박죽이고, 어떤 글은 삼인칭, 어떤 글은 그저 일기같은 글들이다. 그러나 처음보다 지금 더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마음을 기억하고픈 마음으로, 많은 글들 중에 알콩달콩한 것들만 열심히 골라보았다.
우리에게 있었던 수많은 우연의 순간들이 모여서 이렇게 하나의 책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오늘도 감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쉼보르스카의 시로 마무리 하고싶다.
그들은 둘 다 믿고 있다.
갑작스런 열정이 자신들을 묶어 주었다고
그런 확신은 아름답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은 더 아름답다.
그들은 확신한다.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에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그러나 거리에서, 계단에서, 복도에서 들었던
말들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수만 번 서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가?
어느 회전문에서
얼굴을 마주쳤던 순간을?
군중 속에서 '미안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던 소리를?
수화기 속에서 들리던 '전화 잘못 거셨는데요'
하는 무뚝뚝한 음성을?
나는 답을 알고 있다.
그들은 정녕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들은 놀라게 되리라.
우연이 그토록 여러 해 동안이나
그들을 데리고 장난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만남이 운명이 되기에는
아직 준비를 갖추지 못해
우연이 그들을 가까이 끌어당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들의 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웃음을 참으며
훨씬 더 멀어지게도 만들었다.
수많은 암시와 신호가 있었다.
비록 두 사람이 읽지는 못했으나
아마도 3년 전,
아니면 바로 지난 화요일,
나뭇잎 하나 펄럭이며
한 사람의 어깨에서 또 한 사람의 어깨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한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다른 사람이 주웠었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유년 시절의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공일지도.
문 손잡이와 초인종 위
한 사람이 방금 스쳐간 자리에
다른 사람이 스쳐가기도 했다.
맡겨 놓은 여행 가방이 나란히 서 있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어쩌면, 같은 꿈을 꾸다가
망각 속에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모든 시작은
결국에는 다만 계속일 뿐
운명의 책은
언제나 중간에서부터 펼쳐지는 것을.
첫눈에 반한 사랑/ 쉼보르스카 저 / 최성은 역
영어 번역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