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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May 10. 2021

봄, 꽃들이 뜰에서 파도치게 하라

700개 구근으로 연달아 다른 색상의 새로운 꽃들로 물결치는 정원 만들기

어느덧 5월로 접어들었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전부터 봄 구근 이야기를 쓰려고 생각했는데 쓰다 말고 미뤄두어서, 이러다가는 또 완성 못하고 지나가겠다 싶어서, 비 오는 날을 핑계대로, 마당 대신에 컴퓨터를 택하고 앉아서 얼른 사진들을 모아보았다.


화단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때에는, 구근 화단을 보면서, 한 철을 위해서 이렇게 심었다가 다 뽑아내고 새로 심나 싶었는데, 자연의 신비한 섭리 덕분에 각기 다른 꽃들이 계절마다 풍성하게 한 화단에서 돌아가며 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년에, 차고 옆 오래된 나무들을 다 베어내고 거기에 새로 화단을 짓느라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러고 나서는 다년생 꽃들을 여러 가지 사다가 심었다. 남편은 이곳에 영국식 다년생 꽃 가든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남편의 머릿속에는 나름의 설계가 들어있었다.


나는 그냥 여기 한 뭉텅이, 저기 한 뭉텅이, 그렇게만 생각했다. 아니면 한 줄로 나란히? 앞에는 낮은 화초, 뒤에는 높은 화초를 심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파도처럼 레이어를 주며 심어야 한다고 했다. 그럴싸하게 들렸지만 눈 앞에 그 모습이 제대로 펼쳐지지는 않았다.



꽃은 심어 놓으면 어차피 퍼지기 때문에, 작년에 큰 그림을 그리고 몇 가지만 심어놓았고, 그리고 바로 가을을 맞이했다. 그저 내년엔 더 예쁠 거라는 기대와 함께 시즌이 마무리되는 기분이었다. (화단을 만들던 이야기는 벼르기만 하고 아직 쓰지 못했다!)


그렇게 가을이 오면서 우리는 새해를 위한 구근을 준비했다. 구근은 보통 가을에 심어서 겨울을 나고 봄부터 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가을이 가기 전에 화단에 심어야 했다. 10월에 심는데, 그 당시에 참 이모저모 바빴다. 남편의 동위원소 치료도 있었고, 딸도 왔고, 자가격리도 있었고...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두 번에 나눠서 모든 구근을 다 심느라 애를 먹었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물론 아니었다. 뭘 심을까? 난 잘 모르니까, 그냥 가을이 가기 전에 구근을 심어서 봄에 꽃을 보고 싶다는 마음일 뿐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온라인 구근 쇼핑을 하는데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수준이었다. 사실 구근의 종류는 무궁무진하지만, 우리는 보다 친숙한 것들로 심기로 했다. 크로커스, 수선화와 튤립, 설강화, 아이리스가 낙점되었다.


더 심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남편의 질문에 여러 가지를 찾아보고는 아네모네를 추가하였다. 어느새 온라인 구매만 630개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도 놀랐다. 그리고 나니 지난봄에 땅에서 파낸 튤립 구근들도 말려두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생각났다. 사실 걔네들이 제대로 나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정성껏 손질하여 곰팡이 피지 않고 잘 말려 보관되긴 하였으나, 사실 땅 속에 좀 더 있어야 하는 애들을 미리 캤기 때문이다. 그쪽 땅을 뒤집어엎고 다른 것을 하려다 보니, 그냥 죽이게 될 것 같아서 파내어 손질하였던 것이다. 대부분 튤립이고, 크로커스도 좀 있었다.


구해내서 서늘한 곳에 보관했던 튤립 구근들


여기서 끝내지 않고, 구근 심을 때 사용할 베이비파우더 사러 나갔다가 히야신스까지 사옴으로서 거의 700개 가까운 구근을 확보하고야 만 우리, 이거 다 언제 심지? 어디다가 심지?


남편은 정원의 지도를 그리고 어디에 심으면 좋겠느냐고 내게 물었다. 음! 나는 평생 구근을 마당에 심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기껏해야 화분 튤립 하나 키운 게 전부인데, 무슨 아이디어가 있겠는가. 그냥 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남편은 쩨쩨하게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이렇게 심는 것은 싫단다. 뭉텅이로 여기저기까지 쫙 듬뿍듬뿍 이렇게 놓이길 원했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흐름 그대로 하자고 했다. 남편은 배치도를 그렸고, 그렇게 우리는 추운 어느 가을날 구근을 심었다. 막판엔 비까지 왔다.



700개의 구근을 심는 것은 진짜 오래 걸렸다. 땅을 파고 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드릴을 이용해서 구멍을 냈고, 영양을 주기 위해서 본밀(bone meal)을 던져 넣고 나서, 베이비파우더를 묻힌 구근을 넣었다. 베이비파우더는, 다람쥐나 두더지가 먹지 말라고 뿌리는 것이다. 맛있는 냄새를 제거하고, 걔네들이 싫어하는 냄새를 묻히는 것이다. 이웃집에서는 그냥 심었다가 정말 몇 개 안 나왔다고 한탄을 했었다.




겨울에 유일한 색을 보여줬던 호랑가시나무


그러고 겨울이 왔다. 추운 겨울, 구근들이 얼지 말라고 위에다가 두툼하게 나무칩으로 멀칭을 해줬다. 우리 집 겨울에 색을 주는 것은 오로지 이 호랑가시나무(Holly Tree)였다. 크리스마스 같은 색상으로 겨울의 어두운 집 앞을 크리스마스 기분이 들게 해주는 유일한 화사함이었다. 겨울이 오면 크리스마스라고 들썩이고, 눈이 내리기도 하고 나름 낭만에 젖기도 하지만, 겨울의 끝자락으로 가다 보면 지루해지고 얼른 봄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2월로 들어서면서 "언제 입춘이지? 언제 경칩이 오지?" 이러면서 기다리지만, 사실상 입춘도 춥기만 하다.


그런 우리 마음에 봄을 불러주는 것은 역시 꽃이다. 한국에서는 봄을 상징하는 것이 개나리 진달래이고, 또 봄이면 벚꽃축제도 떠올리게 되지만, 그 보다 앞서서 우리를 반겨주는 더 추운 계절의 구근들도 있어서, 꽁꽁 얼은 날씨에 봄을 미리 당겨서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우리 집에서 봄을 열어준 것은 꼬마 붓꽃(dawrf iris)들이었다. 마음도 급하게 1월 말에 서둘러 짤막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날씨가 여전히 추웠고 종종 눈도 내리는데 "저러다가 얼어 죽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온도가 확 떨어지는 밤에는 "위에 뭐라도 덮어줘야 하는 것 아니야?"라며 초조하게 굴었는데, 남편은 그게 자연의 섭리라며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랬다. 자연의 섭리였다. 이 날씨에 문을 연 이 꽃들은 추운 시간을 잘 이겨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이 연두색 더미들은 무엇일까? 우리는 구근들만 심었는데, 왜 이렇게 생긴 것이 나오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거 설마 잡초야? 그러나 잡초라고 하기엔 전체로 퍼지지 않고, 한 군데에서 집중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막상 나오기 시작하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씩씩하게 자라났다.



고민하던 중, 로컬 가드닝 클럽에 이 똑같은 사진이 올라왔다. "우리 집 아네모네들이 올라왔어요!" 생전 처음 보는 아네모네는 전혀 구근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잡초인줄 알고 뽑아버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2월이 시작되자마자 또 다른 잎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봄의 신호탄 같았다. 튤립도 수선화도 잎을 내밀기 시작했고, 설강화가 첫 꽃을 피웠다. 건드리면 그냥 부러져버릴 것 같은 이 아슬아슬한 꽃은 보기에도 애처로웠지만, 가녀리게 그렇게 추위에 서 있었다.



장미도 새 잎을 내보이고, 벚나무도 꽃봉오리를 만들기 시작하고... 정말 이렇게 봄이 오는 것인가 했는데, 역시나 2월 중순에 다시 눈이 내리고 말았다. 벚나무의 꽃봉오리는 그렇게 눈에 덮여버렸다.



다 얼어 죽을까 봐 내 속을 몹시 태우던 첫 설강화는 그 가녀린 몸으로 그 시간을 이겨내었고, 2월 말이 되자 여기저기 본격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겨울을 지켜준 제비꽃도 다시금 꽃을 피우고, 수선화도 빽빽하게 정원을 채워갔다. 뒷마당의 튤립도 수선화도 힘차게 잎을 내밀었다.


붓꽃의 이 보라색은 정말 고급스럽고 우아하다!


꼬마 붓꽃은 이제 앞 다투어 활짝 열렸다. 여기저기 보라색이 보이다가 노랑이 등장했다. 우리의 첫 크로커스는 노란색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보라색이 열렸다.



우리의 첫 번째 파도가 설강화와 꼬마 붓꽃으로 잔잔한 미동으로 시작했다면, 이제 살살 파도가 막 일려고 하는 순간 같은 기분이었다. 모두 한 방향으로 고개를 내민 크로커스는 잎도 참 예뻤다. 녹색 안의 하얀 줄이 포인트처럼 화사했다.


그리고 다음 파도는 수선화였다. 노랗고 작은 수선화였다. 가냘프고 긴 목을 하고는 고개를 살포시 내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예뻤다.


두세개의 꽃이 한 줄기에서 피는 종류도 있다!


한 송이가 열리기 시작하니 모두 연달아 열렸다. 수선화는 참 신기하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뒤 돌아 앉은 녀석은 하나도 없다. 모두 길 쪽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노란색 별처럼 그렇게 화단을 빛나게 하는 수선화들. 아마 우리가 가장 많이 심은 것이 수선화일 것이다. 이 꼬마들을 시작으로, 3월 중순부터 각종 수선화들이 차례로 피어났다.


수선화는 종류도 정말 많았다. 노란색을 안에 품은 하연 수선화가 그 앞의 파도가 되었고...



키가 아주 큰 노란 수선화가 그 앞의 파도를 만들었다.



뒤에서 본 수선화 파도는 이렇게 일렁이고 있었고...


그 뒤쪽으로 몇 송이 안 되는 히야신스가 피었다. 자그맣게 방울방울 올라오더니 어느새 활짝 피었다. 이 히야신스는 정말 향이 좋아서, 앞마당에 핀 향기가 뒷마당까지 흘러왔다.



그리고 사이사이로 다년생 화초들이 살살 올라오기 시작했다. 봄이니까 우리도 합세할 거야! 튤립은 다음 행렬에 참여하려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뒤를 이어서 아네모네가 피었다! 오 세상에! 나는 아네모네를 아마 평생 처음 보았나 보다. 이렇게 예쁘다니! 내가 카탈로그에서 고를 때만 해도, 막연히 예쁠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정말 고급스러운 보라색으로 피어난 아네모네는 마치 벨벳같이 우아했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 때에는 수줍은 듯 봉오리를 오므리고, 화창한 낮이 되면 자랑스럽게 꽃잎을 활짝 펴는 아네모네는 아름다운 공주 같았다. 보라색에 이어서 분홍색도 피기 시작했고, 매일매일 추가로 피어올랐다.



아네모네가 자태를 뽐내는 중에도 수선화는 계속 새롭게 피어났다. 나는 수선화가 이렇게 종류가 많은지 몰랐다. 다음에 피어난 수선화는 안쪽에 몽글몽글 귀여운 팝콘 같았다.



그리고 뒤뜰에 피어난 순백의 수선화는 정말 청순해 보였다. 티 없이 맑고 하얀 모습을 보면 저절로 감탄사가 일었다.



화려하기로 치면, 수선화 중에서 얘가 제일이었다. 안쪽에 겹꽃이 예쁘게 피어서 레이스 옷을 입은 것 같았다.



그리고 4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튤립이 가세하면서 본격적으로 꽃 파도가 밀려왔다.



모든 튤립은 다 초록색으로 꽃봉오리가 올라와 점차로 색상이 변해간다. 어떻게 저런 녹색이 이렇게 선명한 흰색이 될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하였다. 고급스러운 하얀 튤립. 그리고 그중 하나엔 빨간색 무늬가 있었다.



튤립이라 하면 빨간색이 제일 먼저 떠 오르는데, 빨간색은 뒤뜰에 피어났다. 처음에는 이렇게 바위틈에서 잎을 내밀어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쪽으로 밀려 나오게 되었을까? 너무 좁아서 꽃을 피울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어느덧 꽃봉오리를 만들어서 올리고, 다시 녹색 봉오리가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름답게 피어났다



이젠 순서를 가릴 일이 없었다. 그냥 너도 나도 피어났다. 튤립도 각각의 색으로 펼쳐졌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분홍색을 내비치던 이 튤립은 날이 갈수록 진분홍으로 거듭났다.



벨벳 드레스를 차려입은 듯, 고급스러운 보랏빛 튤립들은 그 옆에서 럭셔리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구근은 아니지만, 다년생 금낭화까지 가세를 하여 색을 더해줬다.


그리고 옆뜰. 뒤늦게 피기 시작한 옆 뜰도 노랑과 분홍과 빨강으로 채워졌다. 이 연분홍은 색이 오묘하게 그라데이션처럼 되며 시작되었는데...



점차 완전 분홍이 되어갔다. 그리고 어쩌면 비를 맞아도 이렇게 예쁜지!



그래서 이 700개의 구근은 뒤뜰에서부터...



옆뜰로...



그리고, 다시 앞뜰로 이어졌다.


앞뜰과 옆뜰의 사이에 서서 고개만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마음껏 꽃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꽃의 파도에 그렇게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것이 남편이 말하는, 파도치는 꽃이었던 것이다. 온갖 구근이 모두 함께 피어나서 색을 뽐내는 곳... 그곳에 바로 봄이 있었다.



작년엔 코비드 때문에 튤립 축제 가고 싶은데 못 간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올해는 집에서 축제를 즐기느라 어디를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침에 눈을 뜨면, 온실의 화초를 챙긴다는 핑계로 나와서, 괜스레 앞뜰로 뒤뜰로 왔다 갔다 하면서 분주한 척하다가, 그냥 넋을 놓고 보다가를 반복하였으니까...


이제 5월이 시작되었다. 구근들은 하나씩 시들어가고, 그렇게 시들어버린 꽃들은 잘라줘야 한다. 특히 수선화는 꽃씨를 만드느라 꽃 뒤쪽이 불룩해지는데, 그러다 보면 에너지를 씨에 빼앗겨서 뿌리로 힘이 가지 못 한다. 그러면 씨를 모아서 뿌리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수선화는 씨를 뿌리면 꽃이 필 때까지 한 5년 정도 걸린다. 따라서 그냥 알뿌리로 키우는 것이 낫다.


꽃만 잘라주고 나서 초록 잎들은 에너지를 모으게 그대로 둬야 한다. 그리고 날이 점점 더워지면 잎들도 힘을 잃고 빛이 바래면서 누렇게 쓰러지게 된다. 그러면 그때 나머지 잎들을 바짝 잘라주면, 그들의 전성시대가 끝나고, 가든은 조용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새 식구들을 맞이하여 또다시 다른 색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잘라낸 꽃들은 비료통으로 들어간다


파도처럼 몰려오고, 또 파도처럼 사라지는 꽃들, 이제 그들이 불러온 봄을 우리가 푸른 여름으로 가꿔나갈 것이다. 미리 피어난 꽃 때문에 노심초사 하고, 좁은 바위틈을 비집고 나온 꽃을 구해줘야하나 애를 태웠지만, 자연의 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고, 지금도 이렇게 강하게 변화하고 있다.


나는 이제 여름을 기다린다. 여름에는 이곳이 또 어떻게 옷을 갈아입을지...


바닥이 다 드러나던 화단이 점점 채워져서 가득차고 다양한 색으로 뒤덮이는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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