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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Jun 16. 2021

앗! 깜짝이야!

메밀 싹 날 무렵...

얼마 전에 고마운 지인이 양귀비를 듬뿍 나눔 해주었다. 양귀비 심고 싶은데 우리 집에서는 잘 안 된다고 했더니 와서 가져가라고 해서 갔는데, 정말 듬뿍 수십 개를 얻어왔다. 원래 양귀비는 옮기는 것을 싫어해서 잘 죽는다고 하던데, 이렇게 많다 보면 몇 개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었는데, 와서 심어도 심어도 끝이 안 날만큼 많았다. 다년생 화단에 좀 심고, 우중충한 담벼락 앞에도 심고, 이웃집과 경계선 있는 데에도 줄을 이어서 쭉 심었다. 그리고 너무 기분 좋아서 신나게 사진을 찍었는데, 아뿔싸! 카메라에 메모리카드가 없는 것을 몰랐네! 그래서 생생하게 쭉 심어진 모습의 사진은 건지지 못했다.


그다음 날 사진을 찍으러 나갔더니, 단 하루 지났는데, 대부분이 시들시들 앓고 있었다. 소금에 절여놓은 김치거리 같은 모양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웃집과 맞닿은 부분, 거의 불모지 같은 곳, 잔디 씨를 뿌리고 거름흙으로 덮어두었다
큰 양귀비도 이렇게 축 처져버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일부는 완전히 쓰러졌지만 일부는 제법 기운을 차리고 일어서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민달팽이들이 공격을 해왔다. 남편과 밤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여다봤더니 큼지막한 녀석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잡아서 처리하고 그다음 날부터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구부정했던 아이는 이렇게 S라인을 형성하며 다시 위로 올라서고 있었고, 꽃망울도 안쪽에 잡혀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어제 비가 종일 와서 집안에서 페인트 칠하느라 바빠서 바깥을 못 내다봤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나갔더니! 앗! 이게 무슨 일이지? 이웃집과 연결된 옆 마당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불모지였던 그곳에 빼곡히 돋아난 새싹들! 단 이틀 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꼭 메밀싹 같았다. 설마 작년에 이곳에 뿌렸다가 전혀 싹을 보지 못했던 그 씨앗들이 동시에 이렇게 일어난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그게 벌써 언제인데! 그리고 그 이후에 흙 덮고 비가 온 세월이 얼마인데...


집에 들어와서 남편에게 사진을 보여줬더니, "그거 메밀인 거 같아, 내가 전에 봉투가 뜯어졌다고 했던 거 기억나?" 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남편이 잔디 씨를 뿌리려다가 그 옆에 메밀 봉투가 뜯어져서 쏟아졌길래 그냥 같이 뿌렸더란다. 그리고 열흘쯤 지나서 이렇게 일제히 싹이 올라온 것이다. 생명은 참 신비롭지 않은가?


작년에도 키웠지만, 메밀은 우리가 키워서 수확하려고 뿌린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가꾸지 않았던 우리 마당은 풀이 잘 자라지 않는 곳들이 있는데, 그런 곳들의 땅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커버 크랍으로 사용했던 것뿐이었다.


커버 크랍(cover crop)이란, 사용하지 않는 땅을 활용하여 뭔가를 심는 것이다. 흔히 살아있는 멀칭(living mulch)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잡초가 자라는 것을 방지하는 것인데, 왕성하게 자라서 잡초에게 틈을 주지 않게 하는 종류의 커버 크랍으로는 토끼풀(clover)타임(creeping thyme)이 대표적이다. 이것들은 잔디 대신에 화단에 심어서 지저분한 다른 잡초가 자라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집에 많이 있는 선갈퀴(sweet woodruff)도 역시 커버 크랍으로 들어가는데, 이런 것들은 뿌리가 너무 잘 번져서 다른 것과 함께 키우기에는 사실 문제가 있다. 꽃밭에 심으면 꽃도 죽여버리니 가장자리로 잘 관리해서 키워야 한다.


선갈퀴는 5월에 꽃을 피우고, 미세하게 향기도 난다
기어 다니는 낮은 종류의 타임이다. 빽빽하게 자라서 잡초를 막아준다.


다른 종류의 커버 크랍으로 인기가 있는 것이 바로 메밀(buckwheat)이다. 메밀은 뿌리가 그리 깊지 않아서 나중에 제거하기에도 어려움이 없지만, 척박한 땅에 뿌려놓아도 잘 싹을 틔우고, 게다가 토양환경을 개선한다. 잔디 깎기로 그냥 밀어버리면 그 잘린 조각들이 다 땅으로 들어가서 비료가 되어주는 착한 작물이다. 한 달 정도면 다 자라서 꽃이 피기 때문에 오랫동안 땅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작년에 토양 개선용으로 뿌렸던 메밀. 좀 더 촘촘히 뿌렸어야 했다. 흰 꽃이 피었다.


씨앗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수경 재배해서 새싹용 채소로도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건강식품을 판매하는 회사에서 큰 봉지로 쉽게 구입할 수 있다. 그냥 입에 털어 넣고 먹어도 된다. 고소하고 바삭하다. 보통 거피를 해서 groats로 판매하는데, 오히려 거피한 것이 싹이 더 잘 난다.


이렇게 해서 올해 또 생각지도 않게 앞마당 쪽에 메밀을 키우게 되었다. 날씨가 본격적으로 좋아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니 쑥쑥 자라서 하얗고 정겨운 메밀꽃을 피우기를 기대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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