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소환하는 닭똥집 튀김을 글루텐 프리로 재현하다
지금은 자연과 가까운 삶을 추구하며 건강식을 하고, 술은 거의 마시지도 않지만, 나도 소싯적에는 술도 좀 마시고, 놀기도 좀 했다. 온실 속의 화초에서 벗어나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부모님께 반항을 시도하다가, 나이 서른이 되어서까지도 귀가 통금이 9시를 벗어나지 못하자 나는 드디어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지엄하신 아버지께, 이제 나도 클 만큼 컸으니 집을 나가 독립적인 삶을 살겠다고 말씀을 드린 것이다. 머릿속으로 엄청나게 계산기를 두드려서 혼자 살 궁리를 했건만 아버지는 단번에 반대를 하셨다. 당시는 이미 내가 혼자 반항적 유학까지 하고 돌아온 마당이었기에, 혼자 산다는 것은 내게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여겨졌지만, 아버지는 시집도 안 간 과년한 맏딸을 밖에 내놓으실 준비가 여전히 안 되신 것 같았다.
쟤가 도대체 왜 저래?
이게 아버지가 어머니께 물으신 말씀이었다. 멀쩡한 집을 두고 왜 나가겠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속상한 마음을 보이시는 아버지께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쟤도 이제 나이가 서른인데, 언제까지나 그렇게 통금에 구속을 당하면서 살고 싶겠어요?"
그리고 그날 이후로 통금이 사라졌다. 아버지가 주신 타협이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술자리를 가더라도 나보다 훨씬 어린 후배들을 두고 민망한 얼굴로, "나, 집에 가야 해." 하던 순간이 끝난 것이다. 사실 내 동생들은 이미 다 결혼을 한 상태였고, 나는 당시에 그야말로 "똥차"라고 불리던 노처녀였다. 여자가 서른이 넘어서까지 결혼을 안 하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시대였으니까.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내게 "왜 아직도 결혼을 안 하셨어요?"라고 묻곤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어디가 어때서 결혼을 해요?"라는 궤변론적인 답변을 던지곤 했다. 어디가 어때서 결혼을 못하느냐는 말이 지배적인 시대에 나름의 비틀기를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아무튼 나는 신세계를 만나서 드디어 한가락하며 놀 수 있게 되었는데, 세상은 역시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당시에는 밤 12시가 되면 모든 술집과 음식점이 영업을 중지해야 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도 문을 닫은 후 몰래 영업하는 곳들이 물론 있었다. 그것도 일종의 반항심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새로이 유행하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하이텔 통신이었다. 지금이야 각종 SNS가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그때에는 보급형 하이텔이 생기기 시작하던 시절이었고, 익명의 사람들이 닉네임만 가지고 서로 교류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는 동호회를 만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전공이었던 불어를 이용해서, 몇몇 사람들과 불어 동호회를 꾸리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후로, 불어를 빙자하여 모여서 놀기에 바빠졌다. 물론 간혹 불어 스터디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친목이 늘 앞섰다.
만나면 저녁을 먹으며 술자리를 갖고, 끝나면 2차로 음악이 요란한 락카페를 가서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12시가 되어 쫓겨나면 당구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통행금지가 해당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놀고 나면 다시 출출해지기 마련이다.
그때 우리가 몰려갔던 곳이 실내 포장마차 88우짜집이었다. 당시에는 툭하면 모든 상표에 88이 붙던 시절이었고, 그 집의 기본 메뉴는 우동과 짜장이라고 붙인 이름이었다. 낮에도 문을 열고 식당 영업을 하는 곳이었지만, 밤에는 거기에 닭똥집 튀김과 소주를 얹어 문을 닫고 몰래 영업을 하였다.
그 집의 짜장면은 정통 중국집 스타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짜장라면 같은 맛도 아니었다. 뭔가 구수한 그 집 만의 맛이 있었다. 그리고 늘 볶음으로만 접하던 닭똥집을 그 집에서만 튀김으로 해서 팔았는데 맛이 정말 기가 막혔다.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고 고소하면서도 쫄깃한 맛은 우리를 얹제나 그 집으로 향하게 했다.
자식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면 문을 닫을 거라고 늘 말씀하시던 주인아저씨는 정말로 어느 날 영업을 그만두고 사라지셨다. 그리고 그 기가 막힌 닭똥집을 우리는 다시는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그때 함께 나눴던 젊은 날의 고민들과 흥겨웠던 시간 덕분에 여전히 좋은 친구로 남아있다. 가끔 만날 때면, 그 추억을 소환해서 닭똥집 대신 함께 씹곤 했지만, 3년 전 캐나다로 이민 온 이후, 그 추억을 같이 씹을 친구들도 만날 수가 없었는데...
며칠 전 새로 간 슈퍼마켓에서 자연 방사 닭똥집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30년 전 기억이 소환되면서 닭똥집을 향한 사랑에 불이 붙어 그것을 두 팩 덥석 집어 들었다. 그게 바로 최근 우리 식탁에 닭똥집이 오른 계기가 되었다.
닭똥집을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남편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정말 정성껏 준비했다. 잘못 조리하면 냄새가 나기 때문에 깨끗하게 씻는 것이 첫 번째 관문이다. 소금을 뿌려서 문지르고, 다시 밀가루를 뿌려서 열심히 비벼 씻어야 한다. 물로 헹군 후에도 잘 들여다보면서, 색이 누런 부분이나 지방이 뭉친 부분이 있으면 깨끗이 제거해주는 것이 좋다.
충분히 씻었다 싶으면 다시 소주나 와인을 뿌려서 잠시 둔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냉장고에서 한나절 정도 두면 더욱 좋다. 그리고는 건져서 물기를 닦아준다. 키친타월이나 면포를 사용해서 완전히 마르게 닦아준다. 튀길 것이니 물기가 최대한 없도록 해야 한다.
한입 크기로 잘라주는데, 처음에는 마디마디로 자르다 보니, 결 반대로 자르는 것이 식감이 더 좋겠다 싶어서, 길게 잘랐다. 그리고는 마늘가루와 소금, 전분을 뿌려 골고루 코팅해 준다. 어차피 양념간장이나 소금에 찍어 먹을테니 간이 셀 필요는 없다. 그리고 마늘가루를 조금 넣으면 냄새를 확실하게 잡아주면서 감칠맛을 더해준다.
이제 튀김옷을 만들어 담갔다가 튀겨내면 끝이다. 토실한 근육이 잘 안 익는 것 같다고 너무 오래 튀길 필요는 없다. 한 2~3분 정도 튀기고 나서 건져낸 다음, 타 튀긴 후에 전체를 다시 한번 2~3분 튀겨주면 속까지 다 익고 더 바삭하다.
튀김은 다 튀긴 후에 기름을 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수분을 날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바삭해진다. 두 번 튀기는 것도 그 이유이다. 따라서 튀긴 후에도 뜨거울 때 수분이 충분히 날아갈 수 있도록, 겹치지 않게 늘어놓는 것이 좋다.
남편이 나간 사이에 내가 다 튀겨놨더니 남편이 들어왔다. 이건 왜 튀겼냐고 묻는데, "글쎄 저녁에 먹을까 하고..." 라며 말을 흐리니, 장난스레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얼른 말을 바꿔서, "애피타이저나, 아니면 간식?" 그랬더니 씩 웃는 게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후다닥 접시에 좀 담아서, 집에서 만든 청주를 곁들인 오후 간식을 하였다. 옛날 맛이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억을 할 수는 없었지만, 전혀 잡냄새 안 나고, 고소하고 쫀득하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나눠주니, 그 시절에 자신도 나를 찾아와서 함께 놀고 싶다며 웃었다. 이젠 30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우리 옛날 친구들도 모두 불러다가 함께 먹고 싶구나!
5인분
재료:
닭똥집(닭근위) 600g
굵은소금 1/8 컵
밀가루 1/4컵
소주 또는 와인 1/2컵
마늘가루 1 작은술
소금 1/2 작은술
타피오카 전분 1/4컵 (또는 다른 전분 가능)
글루텐프리 밀가루 1/2 컵 + 타피오카 전분 1/2컵 + 소금 한꼬집 (또는 튀김가루 이용)
달걀흰자 1개 분량 + 물 : 총 1컵
라드, 또는 튀김용 기름
만들기:
1. 닭똥집에 소금을 뿌려서 바락바락 문지르고, 다시 밀가루를 뿌려서 문질러준다.
2. 찬물로 깨끗하게 헹구고, 지저분한 부분은 싹 씻어낸다.
3. 와인이나 소주에 잠시 담가 둔다. 하룻밤 담근다면 냉장고에 보관한다.
4. 건져서 키친타월로 물기를 완전히 닦아낸다.
5. 먹기 적당한 사이즈로 잘라준다.
6. 마늘가루와 소금을 넣어서 버무려주고, 다시 전분을 넣어 버무린다.
7. 튀김옷을 만든다. 글루텐프리를 원하지 않으면 시판 튀김가루로 간단히 사용가능하다.
튀김옷에 달걀 흰자를 섞어 넣으면 튀김이 더욱 바삭해진다.
8. 적당히 달궈진 튀김기름에 넣어서 3분 정도 튀겨낸다.
9. 다 튀기고나면, 제일 먼저 튀긴 것부터 다시 3분씩 더 튀겨낸다.
10. 양념간장이나 소금을 찍어서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