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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Jan 17. 2022

이번에도 감사한 크리스마스

많이 먹고, 많이 나눈 시간

크리스마스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이 환 했다. 밤새 눈이 듬뿍 내렸고, 또 계속 내리고 있었다. 밴쿠버에서 기대도 하지 않았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이곳은 원래 밤새 눈이 와도 아침에 비로 바뀌어 오후에 다 사라지는 날씨인데,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종일 눈이 왔다. 마치 하늘에서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다.


현관 입구에는 인조 트리를 미리부터 펼쳐두는 게 우리집 스타일. 트리 색이 다양하게 변화하니 재미나다.


이래 저래 발을 동동 구르며 크리스마스 준비를 뒤늦게까지 하는 바람에, 막상 집안의 크리스마스 준비는 정말 턱에 받쳐서 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상점에서 일찍 품절되어서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서 구했지만, 정작 그 나무도 바깥 데크에서 비를 맞으며 차례를 기다리다가, 크리스마스이브에서야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서는 감히 생나무를 잘라서 트리를 만든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하지만, 서양에서는 어릴 때부터 진짜 나무를 잘라서 트리를 장식하던 추억을 가지고 있기에 가짜 나무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옵션일 뿐, 대부분은 진짜 나무를 갖고 싶어 한다. 


꽃을 화병에 꽂듯이 나무도 밑에 물을 놓고 그렇게 꽤 오랫동안 푸르게 거실을 지키게 되는데, 이때 나무에서 나는 향기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왜 사람들이 생나무를 원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집은 올해에도 남편 키 만한 생나무 트리를 거실에 세웠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저녁식사를 마친 후 캐럴을 틀고 장식물을 달았다. 방학으로 돌아온 딸도 함께 웃으며 장식하는 시간은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는 일이 많은 딸아이는 방학이 되어서 집에 왔는데도,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느라 컴퓨터 앞에서 벗어나지 못할 만큼 바빴다. "내가 이러려고 집에 왔나!"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투덜대면서도 엄마 아빠의 밥을 얻어먹으며 일하는 딸의 표정에는 행복이 묻어있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대림절 마지막 촛불을 켜고는 밤늦게까지 장식을 하였다. 남편이 만든 에그넉을 마시고, 벽에는 크리스마스 양말을 걸었다. 밤중에 산타가 올 테니 말이다. 그리고 동부의 누님이 보내주신 크리스마스이브 선물을 풀었다. 트리에 걸 수 있는 예쁜 하트 장식이었다.


트리가 있는 창 밖으로 눈이 보이니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실감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는 늦잠을 잤다. 이른 아침부터 선물 풀자고 방방 뛰어다닐 아이가 없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젊은 딸이 제일 먼저 일어나서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아침을 챙겨 먹여야겠다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크리스마스 아침식사는 스콘으로 먹는 것이 우리 집 관습인지라, 부지런히 나가서 전날 밤 준비해둔 가루 재료 액체를 부었다. 그런데 실수 발생! 남편은 밀가루를 못 먹고, 딸은 유제품을 못 먹기 때문에, 두 가지를 따로 준비했는데, 실수로 액체를 잘못 부은 것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다시 반죽을 하고...


서두르는 엄마의 손길을 잡은 딸내미의 사진


스콘은 둘 다 그럴싸하게 나왔다. 밀가루 없는 글루텐프리 스콘(https://brunch.co.kr/@lachouette/359)은 이미 이전에 해본 적이 있어서 쉽게 잘 만들었고, 나머지 유제품 없는 스콘도 맛있게 나왔다. 향을 얹어주기 위해서 마당에 나가서 눈 맞은 로즈메리를 잘라다가 넣었는데, 아주 잘한 일이었다. 



여러 가지 잼과 버터를 곁들인 스콘은 우리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살려주기에 아주 적합했다. 이렇게 배를 채우고 나서는 드디어 선물을 풀 차례가 되었다. 애들 있는 집이면 어림없었을 텐데, 어른들이라고 배부터 채우다니! 


아침에 나왔을 때 산타가 다녀간 흔적! 크리스마스 양말 안에 들어가지 못한 선물들은 박스 안에 들어있다.


산타가 준 선물부터 풀었다. 우리 집에서 산타의 선물이란, 자질구레한 잡동사니 선물들을 크리스마스 양말에 넣어주는 관습이다. 서양의 모든 집이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서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다. 천원샵에서 산 작은 물건들부터 꽤나 쓸모 있는 근사한 물건이 들어있기도 하다. 이건 공식적으로 산타가 주는 선물이다. 


이 선물을 위해서 남편은 일 년 내내 작은 선물들을 꾸준히 모으곤 했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경제사정이 넉넉지 않던 시절, 좋은 선물을 주지 못하는 순간에도 아이들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해주고 싶은 아빠의 손길이었던 것이다. 장난스러운 선물도 들어있고, 일반적으로 선물로 구매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살림살이들도 있다. 


처음에는 남편 혼자서 이것을 다 준비했지만, 한 해, 남편이 갈비뼈를 다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아이들이 나서서 함께 크리스마스 양말의 선물을 준비하고 채워 넣었다. 그래서 그와 결혼한 이후에는 나도 평소에 꾸준히 이것저것 준비를 해놨던지라 남편의 양말에 넣을 것이 있었고, 아이도 알아서 준비를 해왔다.



크리스마스 양말을 다 열고 나서는 선물을 풀었다. 평소에 가지고 싶어 할 만한 것 중에서 약간 비중 있는 것이 선물로 선택이 된다. 아이에게는 은으로 된 냅킨링을 선물했고, 남편에겐 가든용 버드 배쓰, 나에겐 레인재킷이 왔다. 


서양 가정에서는 흔히 대부가 대녀에게 이니셜을 새긴 냅킨링을 선물한다고 얘기했던 적이 있었는데, 우리 딸에게는 새아빠가 주는 선물이 되었다. 남편은 마당에 작게 물을 담아 새들이 목을 축이는 장식품을 늘 갖고 싶어 했기에 취향에 맞는 것으로 골랐다. 나는 늘 비가 오는 이 지역에서 마당일을 할 때 필요한 비옷이 마땅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장만하게 된 셈이었다. 


그밖에 여기저기서 온 고운 선물들이 많이 있었다. 선물을 모두 풀고 나서는 대략의 정리가 필요했다. 저녁 먹을 준비도 해 놓고... 그러더니 딸은 더 늦기 전에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눈이 펑펑 왔으니 안 그러면 서운하리라. 밖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뒷산 위의 작은 나무에도 전구를 설치해놓았는데, 눈이 오니 더욱 돋보였다.
눈 내린 바깥 풍경은 참 예뻤다. 크리스마스 전구가 눈에 파묻혀서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아이는 눈사람을 만들고, 남편은 드라이브 웨이의 눈을 치웠다. 그리고 나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으나 삼각대도 없이 찍은 야경은 죄다 흔들려서 별로 건질 것이 없었다. 눈은 생각같이 잘 뭉쳐지지 않아서 아이는 낑낑 매고 눈을 눌러댔다.


이웃집들의 장식

이웃집도 눈을 치우러 나와서는 서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함께 웃는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거리를 뛰어다니고, 이웃집 아빠는 아이들에게 눈썰매를 탈 수 있게 마당에 눈을 눌러주고... 눈 속에 덮인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활기 있었다. 

소닐라가 커뮤니티에 올린 글

그러다가 이웃 집 여인 소닐라가 갑자기 생각난 듯 새 이야기를 꺼냈다. 그 집 마당 나무에 새가 한 마리 걸려서 보호 중이라는 것이었다. 맥박이 너무 느리게 뛰고 있고, 발톱에 뭔가 걸려있는 것 같은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동물을 좋아하는 우리 딸은 눈을 반짝였고, 소닐라는 우리는 현관으로 데려가서 박스에 담아놓은 새로 데려와 보여줬다.


정말로 새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찌할지 몰라서 일단 동네 커뮤니티 페이지에 사진과 함께 도움 요청을 올려놨다는 그녀는, 새의 발톱을 보여주겠다며 새를 이리저리 밀쳐 보았다.


새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퍼드득 거리더니 날아서 그 집 크리스마스 트리안으로 숨어버렸다. 소닐라는 놀라서 새를 잡으러 가고, 우리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착한 그녀는 새를 전혀 다룰 줄 몰랐던 것이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딸아이는 "저 집에는 어린애들도 있고 산만해서 새가 안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라고 말을 했다. 차마 자기가 돌보고 싶다는 말은 못 했지만, 그러고 싶은 눈치였다. 어릴 때부터 워낙 동물을 좋아해서 습성을 잘 알고 있는 딸의 눈을 쳐다보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소닐라에게 물어봤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반가이 듣고는, 새를 잡으면 우리 집으로 갖다 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만들다가 만 눈사람을 미뤄두고는 서둘러 집으로 들어와서 마땅한 사이즈의 박스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 안에 낡은 타월을 깔았다. 미끄럽지 않고 포근한 느낌을 갖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소닐라가 새를 데려오자 아이는 두 손으로 얌전히 새를 안아 옮겼다. 심장이 정말 약하게 천천히 뛰고 있다고 말했다. 원래 이런 조류들은 스트레스에 약해서, 심하면 그냥 죽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안정은 필수이다. 이 새는 개똥지빠귀(thrush) 종류이고, 원래 먹이는 벌레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당장 벌레를 잡아줄 수는 없으니 일단 물과 곡류를 좀 제공하고 내일까지 안정을 찾게 한 후 동물보호소에 데려다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저녁을 먹어야 했기에, 새를 딸아이 방에 데려다주고, 그 위에 빨래 바구니를 덮었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타월을 덮어 어두운 곳에서 안정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불을 끄고 나왔다.


포럼 포스팅에는 그사이에 덧글이 잔뜩 달렸다. 빵을 주지 말아라든지, 타월로 덮어줘라든지, 동물보호센터에 데려다 주라든지 다양한 도움말들이 있었고, 모두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이었지만, 심지어 씨앗을 갖다 주겠다고 하는 등 모두 이 작은 새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우리 집에서는 매년 거위 고기를 먹는데 올해는 구하기 힘들어서 먼 곳까지 가서 구해와야 했다. 그래도 구해져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새와 씨름하는 사이에 거위는 완성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거위기름도 요리용으로 따로 잘 받았다. 거위기름은 잘 구분해서 굳혀놓으면 아주 풍미가 좋은 요리 기름이 된다.



준비된 저녁식사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남편의 요리 솜씨는 이미 확실한 것이었고, 식사는 시간 맞춰 준비가 이루어졌다. 원래 남편의 자식들까지 모여서 하기로 했던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는 이렇게 우리 셋이서 단출하지만 럭셔리하게 먹었다. 


수프로 시작해서, 샐러드, 그리고 본식인 거위는 여러 가지 야채와 곁들여졌다.


마지막으로 디저트는 블랙베리 소스를 얹은 커스터드푸딩과 에그넉을 함께 서빙했다. 거기에 물론, 한 달 전에 미리 만들어 둔 피기 푸딩을 따뜻하게 데워서 함께 냈다. 브랜디 소스를 끼얹어서 먹으니, 한 달 동안 숙성되어 맛이 더 깊어졌고, 역시 따뜻하게 먹는 게 제맛이었다.


저녁과 디저트를 마치자 딸아이가 새를 다시 확인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식사하는 동안 몇 시간이 흘렀으니 그 사이에 물이라도 좀 먹었는지 궁금했던 우리는 다 함께 방으로 가봤다. 새는 씨앗도 물도 전혀 건드리지 않은 눈치였다.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 했던 것이 분명했다. 



이러다가 밤 사이에 죽으면 어떡하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소닐라가 말했던 발톱 끝의 검은 조각이 눈에 들어왔지만, 막상 새는 그새 좀 똘망해진 것처럼 보였다. 물이라도 좀 먹지 싶어서, 내가 물 잔을 좀 가까이로 놓아주려는 순간 새는 힘차게 날아올랐다. 물론 갈 곳이 없어서 결국 한쪽으로 푸드덕하고 내려앉았지만, 날아오르는 모습에 힘이 있어 보였다.


딸아이가 손으로 조심스레 잡아보더니, "심장이 빨라졌어요!"라고 말했다. 어두운 곳에 조용히 앉아서 쉬면서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서 기운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이 추운 겨울에 불안하니 오늘 밤은 집에서 재우는 게 어떻겠느냐 했지만, 나보다 자연을 더 잘 아는 남편과 딸아이는 차라리 지금 보내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다. 


분명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것이라며, 날갯짓이 정상으로 돌아왔음을 확신하는 두 사람. 그래서 우리는 결국 이 아이를 안고 베란다로 나갔다. 혹시 날지 못할 것 같으면 다시 데리고 들어오기로 하였지만, 딸아이가 하늘로 띄우자 새는 힘차게 밤 속으로 날아갔다. 



길고 길었던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지나갔다. 게을렀던 아침에도 불구하고 하루 동안 참 많은 일이 벌어진 기분이었고, 선물 풀기 놀이도, 맛있는 음식도, 눈 즐기기와 새 구출작전까지 모두 하루 안에 일어났다는 것이 신기했다. 창 밖은 눈이 깊게 쌓여있었고, 크리스마스 라이트도 앞마당과 뒷마당에서 함께 빛났다. 




밀리고 밀린 크리스마스 글이 작가의 서랍에서 골칫거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날짜는 1월 중순을 지나고 있으니 결국 또 다른 글들처럼 시기를 놓친 채 묻혀버려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그래도 그대로 툭툭 털어 마무리를 하기로 결정하고 글을 적었다. 이 글은 그냥 나의 크리스마스 관련 기록을 위해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여기서 끝내야 하는데, 이왕 일기처럼 끌고 온 거, 크리스마스 다음날까지가 한 묶음이니 박싱데이 런치까지 사진 올리기로 마음을 바꿨다.


크리스마스 저녁때 거위와 함께 먹기로 했던 우리 집의 와인을, 새랑 정신없는 통에 까맣게 잊어버렸기에, 다음 날에라도 와인을 열었다. 만 일 년을 넘긴 와인은 여전히 숙성 중이었지만, 그래도 일부는 병에 담아서 젊은 채로 즐기는 중이었기에, 크리스마스에 오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달리 슬림한 병과 딸이 만들어준 라벨은 와인에 럭셔리함을 더해주었다.



제철에 손질해서 얼려 둔 점박이 왕새우와, 지난가을에 만든 훈제연어, 치즈 플레이트, 훈제 굴을 곁들여서, 우리는 우리의 크리스마스 만찬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정말 잘 먹었으니 당분간은 좀 자제해야지, 베둘레헴 넓어져서 큰일 나겠다!"라고 주장했지만 과연 며칠이나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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