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들이 깨어나고 싶어서 꿈틀거린다.
밴쿠버의 이번 겨울은 평소보다 더 추웠다. 평소에도 겨울은 내가 가장 반기지 않는 계절인데, 이렇게 추우니 더욱 움츠러들고 즐겁지 않은 기분이었다. 사실, 농사를 짓거나 마당을 가꾸는 사람들은 겨울철에도 은근히 일이 많은데, 나는 정말 움츠리고 한 달 간을 보낸 것 같다.
그래도 집안으로 들여다 놓은 것들이 파릇파릇한 기쁨을 주기도 하고, 꽃을 피우기도 하니 마음은 애달프게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 고추가 풍작이었길래 그대로 뽑아버리기 아까워서 화분에 옮겨 심고 온실에 넣어뒀다. 그리고 그중 한 녀석은 대충 가지치기를 한 후 집안 창가에 두었는데, 새로 잎이 나더니 꽃까지 조롱조롱 맺히는 게 아닌가? 일조량이 적고 온도도 적합하지 않으니 실제로 고추가 달리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살아서 생명력을 보여주는 게 너무나 신기하고 고맙다.
그리고 이 이름 모를 꽃은, 걸어놓는 꽃바구니에 딸려온 녀석인데, 겨울 들어갈 무렵 부러진 줄기를 흙에 꽂아놓았더니, 이렇게 겨울 내내 꽃을 피운다. 줄기 끝에서 꽃이 하나 피고 지면, 새로 그 옆에 다시 봉오리가 맺히고, 그렇게 반복하며 꽃을 선사한다.
그러다가 일월 중순이 넘으며 슬쩍 날이 풀리는 것 같길래 앞마당을 정리할까 싶어 나가 봤다가 작년 여름이 심은 동백이 한송이 활짝 핀 것을 발견했다. 정말 눈이 번쩍 뜨이면서, 나야말로 어서 깨어나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차가운 겨울에 화사하게 피어난 한 송이가 주는 기쁨이 어찌나 크던지!
동백은 원래 겨울에 피는 꽃이라 해서 더 마음이 끌려서 지난여름에 구매했는데, 드디어 첫 꽃이 피었으니 자리를 잘 잡은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는 다른 꽃망울들도 필 준비가 된 모습이어서 더욱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땅을 밀고 올라오는 구근의 싹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 첫 시작은 설강화(snowdrop)였다. 이 손톱만 한 가녀린 흰 꽃은 어째서 이렇게 추운 계절에 피는지 참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작년엔 튤립이 3월이나 되어서 올라왔는데, 올해는 벌써 싹이 많이 돋았다. 사실 빨리 나와도 걱정이긴 하다. 아직 한파가 몇 번 더 쓸고 지나갈 테니 말이다.
흙 속의 생명체가 이렇게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니, 우리도 몸이 근질근질할 수밖에 없다. 움츠리고 집안에 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이리라.
남편은 요새 팔을 살짝 다쳤는데 깨끗하게 낫지 않아 좀이 쑤셔하더니, 급기야 거름흙을 주문했다. 겨우내 얼었다가 살짝 주저앉은 흙들을 덮어주고, 텃밭 흙도 북돋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4 입방 야드의 흙이 한 트럭 도착하자, 우리 집 앞 드라이브웨이는 이런 어수선한 모양새가 되었고, 남편은 결국 팔을 걷어붙이고 나가서 마당과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른 가지들을 잘라내고, 여기저기 남아서 뒹구는 낙엽들도 거두고, 할 일은 넘쳐났다. 나도 옷을 겹겹이 껴입고 나가서 땅을 깨우는 일에 동참을 했다.
그런데 마당 한 구석에 의문의 봉우리 같은 것이 보이는데 도대체 뭔지 모르겠는 것이다. 여기 원래 뭐가 있었더라?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맞아! 여기 머위가 있었는데! 그러면 이게 머위라고?"
작년에 얻어다가 키우기 시작한 머위는 그리 씩씩하게 잘 자라지 않아서 사실상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했는데, 그게 이렇게 뿌리를 뻗치면서 겨울 동안 씩씩하게 자리를 잡은 것일까? 나는 얼른 사진을 찍어서 텃밭 동호회에 올렸더니, 역시나, 머위 꽃봉오리라는 답이 순식간에 올라왔다. 역시 다들 척 보면 아는구나! 이 머위 꽃을 데쳐 초고추장 찍어 먹으면 맛있다는 덧글까지 달렸다.
그래서 우리는 전체를 완전히 흙으로 덮으려던 것을 포기하고, 드러난 뿌리만 덮은 채 봉오리를 빠꼼하게 열어둘 수밖에 없었다.
거름흙은 완전히 삭혀서 판다고 해도, 아직 덜 삭은 부분도 있고, 덩어리 진 곳도 있기 때문에, 화단에 예쁘게 덮고 싶으면 한 번 걸러주는 것이 좋다. 남편은 꽃밭에 뭉텅뭉텅 덩어리 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 체를 만들어서 걸러서 사용한다.
앞마당 작업을 마친 후에는 집 맞은편 담장 앞을 정리했다. 저 집은 이쪽에 문이 없기 때문에 관리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우리 집에서 보기에 지저분하므로 우리가 종종 정리한다. 나뭇잎은 정말 풀로 붙인 듯 도로에 밀착되어있었기에 삽까지 가져와서 치워야 했다.
공을 들여 치우니 길이 말끔해졌다. 조그맣게 흙이 보이는 저곳에는 꽃을 심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즐기고, 산책하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즐길 수 있으니 좋다. 물론 맞은편 집의 동의를 얻고 하는 일이다.
뒷마당과 텃밭에도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오늘 일단 여기서 후퇴했다. 아직 해가 짧은 밴쿠버 지역은 이러고 나서 바로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늘 봄을 좋아하고, 여름을 더 좋아하지만, 가을이 있기에 땅이 비옥해질 수 있으니 감사하고, 또한 추운 겨울을 지나야 만 다시 힘을 내서 자라는 생명들이 있으니 그 어느 것에도 투덜댈 수가 없다. 자연은 늘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추운 시기를 잘 활용하고 준비해서, 모퉁이 돌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봄을 멋지게 맞이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벌써 입춘도 지났고, 이제 한 달만 있으면 수선화와 크로커스가 가득하게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튤립과 각종 꽃들이 줄줄이 이어질 생각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