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끝자락, 분홍에서 푸른색으로, 다시 분홍으로...
내가 이 꽃을 만난 것은 작년 봄, 동네 길 모퉁이에서였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예쁜 꽃이 어느 집 담장 바깥쪽에 피어있었다. 그 주인이 심은 것인지 아니면 저절로 핀 꽃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두드러지지 않으면서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참 예뻤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괜스레 그 앞에 멈춰서 내다보기도 하고, 산책하면서 기웃거리기도 하였는데, 그렇다고 이름도 모르는 이 꽃을 얻자고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르기까지는 좀 뻘쭘하여 사모곡으로 애태우며 그렇게 여름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 꽃은 계절이 바뀌어도 계속 피고 있었다.
가을 어느 날, 나보다 훨씬 더 꽃을 좋아하는 이웃집 여인 소닐라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꽃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물론 그녀도 이미 눈여겨보았고, 꽃에 대해서 더욱 적극적인 그녀는 이미 집주인과 이야기를 나눠서 씨앗을 받아놓은 참이었다. 같은 꽃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반가워하더니, 몇 개 안 되는 꽃씨를 내게 나눠주었다.
사진으로 검색을 해보니 꽃의 이름은 맬로우(mallow)였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아욱이라는 게 아닌가! 세상에! 나는 한국에서 텃밭을 키워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 아욱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잎이 정말 똑같이 생겼다. 그래서, 이 서양사람들은 역시 아욱도 꽃으로 즐기고 먹지를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찾아보니, 맬로우는 꽃과 잎, 뿌리까지 모두 먹을 수 있다고 영어로 설명이 나와있었다.
그리고 봄이 시작되면서, 텃밭 모임에서 꽃씨 나눔을 했다. 그중에서 아욱 씨를 나눠준다길래 얼씨구나 받아왔다. 보니 씨앗도 똑같이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텃밭에 심어 두고 나름 들떠 있었다. 싹이 올라오는 모습도 참 예뻤다. 같은 화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소닐라에게 받은 씨앗과 텃밭 모임에서 받은 씨앗을 분리해서 파종했다. 아욱 씨앗은 텃밭에 심었고, 맬로우 씨앗은 모종을 만든 후에 온실 옆에 심었다.
그런데 자라면서 모양이 사뭇 달랐다. 처음에는 완전히 똑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맬로우는 길쭉하게 자라면서 잎은 크게 발달하지 않았고, 아욱은 큼직한 잎이 턱턱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보여서 다시 찾아보니, 맬로우는 당아욱이었다. 아욱국을 끓이는 그 아욱과는 다른 꽃이었던 것이다. 아욱도 꽃이 피기는 하였지만 아주 작고 조용한 느낌의 꽃이었다. 사실 멀리서 보면 꽃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
그에 비하면 당아욱은 제법 화려하다. 우리 집에는 밝은 색을 먼저 키우기 시작했고. 이후에 짙은 색을 키웠는데, 봄에 심은 것보다 한 여름에 아무 생각 없이 뿌려둔 씨앗이 더 크게 자라서 번성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이 꽃으로 꽃차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작은 그릇을 챙겨 들고나가서 꽃들을 따 가지고 들어온다. 그리고 하나씩 꽃술을 떼어내고는, 손으로 조심스레 잡아서 하나씩 씻는다. 전에 민들레 꽃차도 만들어봤지만, 당아욱은 그것보다 훨씬 약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한지나 면포에 하나씩 펼쳐 얹어서 조심스레 말려야 한다. 실온에 말리기도 하고 오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을 선택해도 손이 간다. 실온에 말리면 건조에 시간이 오래 걸려서 자칫하면 다 펼쳐놓았던 꽃이 혼자 오므라들어버리기도 한다.
오븐을 사용한다면, 오븐의 최저 온도에 5분 넣었다가, 다시 5분 꺼냈다가를 여러 차례 반복하며 완전히 마를 때까지 작업한다. 한꺼번에 빨리 말리려고 하면 자칫하면 탈 수 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해서, 보통은 그다음 날 다시 한번 말리기를 반복해준다.
처음에는 반 건조된 것을 접시에 올려 마저 말렸는데, 그대로 접시에 붙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아름다웠다.
완성이 되면, 유리병에 가지런히 모아 밀봉한다. 습기가 들어가면 좋지 않다. 나는 손바닥 위에 올라가는 작은 유리병에 담았는데도 한 병에 50개나 들어갔다.
선물용으로, 스티커를 출력해서 붙이고, 박스에 담아보았다. 소중한 분에게 크리스마스나 감사 인사로 약소하게 전하기에 딱 좋은 모양새가 완성되었다.
마실 때 나는 보통 뜨거운 물 한 잔에 꽃 3송이 정도를 넣는다. 그러면 꽃에서 푸른 물이 빠져서 찻물을 물들인다. 취향에 따라서 다섯 송이를 넣어서 푸른색이 진하게 배어 나오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차를 준비하고는 마지막에 한 송이만 위에 띄워도 예쁜 모양을 눈으로 즐길 수 있다.
우러나온 찻잔에 레몬즙을 떨어뜨리면 찻물이 연분홍색으로 변한다. 맨 처음 꽃피었을 때의 색을 되찾고 싶은 것일까?
당아욱 꽃차는 기관지염에 좋고, 이뇨작용을 해주어 부인병에 좋고, 염증을 줄여준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아름답게 펼쳐진 꽃이 잔 위에 떠있는 것을 보면 심리적인 행복감을 주는 점도 크다.
이제 매일 비 내리는 밴쿠버의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 문턱으로 들어서려 한다. 오늘 보니, 이제 꽃은 거의 안 필 거 같다. 물론 한 두 송이 정도는 당분간 계속 피겠지만... 겨울 동안은 차를 마시며 그리움을 달래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