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몸이 되기 위한 어려운 관문
한국에는 흔히 정년이 정해져 있어서, 해당되는 나이에 은퇴를 한다. 그러나 이곳 캐나다에서는 본인이 원하는 때에 은퇴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찍 하고 싶으면 50세가 되기 전에도 할 수 있고, 더 일하고 싶으면 하염없이 오래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대안학교 교사인 남편이 은퇴를 벼른 것은, 내가 아는 바로만 해도 벌써 4년 전이다. 그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이니 그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해에 들었던 말은, 꼭 졸업시키고 싶은 아이가 있어서 그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함께 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함께 해주고 싶은 아이가 하나뿐이겠는가! 은퇴는 이래 저래 쉽지 않았다. 결국 일흔이 되는 올해는 꼭 은퇴를 하겠다고 했고, 사실 그 나이까지 일을 하는 것이 버겁기도 했을 것이다. 이제 좀 자유롭게 다른 하고픈 일을 해도 되지 않겠는가!
남편은 은퇴를 앞두고 상당히 들떠 있었다. 미뤘던 하고 싶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으리라. 만들다 말고 창고에서 손상되어가는 보트도 완성하고 싶고, 집안도 싹 뒤집어서 새로 인테리어를 하고 싶어 했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그에 맞춰서 조금씩 조금씩 보완하며 살았지만, 근 20년간 여기서 살았으니 손을 보자면 끝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신남과 별도로 나는 걱정이 되고 있었다. 애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챙기는 줄 아는데, 그 작별이 과연 그렇게 쉬울까 싶었다. 형식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이기에 은퇴식 같은 것도 절대 안 한다고 했다. 그냥 평소와 똑같이 손 흔들고 나올 거라고... (그건 자기 생각이고!)
아니나 다를까 내가 걱정했던 것처럼 남편은 크게 몸살을 했다. 본인의 내면에 잠재해있던 작별에 대한 슬픔의 방어기제로 공황장애까지 밀고 올라왔으니 그 아픔의 크기는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이었던 것이다. 결국 아이들 졸업식도 못 챙기고, 수업도 다 끝난 다음에 학교에 가서 성적을 낼 수 있을 만큼 간신히 회복을 하였으나, 아이들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지난주 목요일,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었다. 평소 3시쯤 일정이 끝나지만, 그냥 일찍 12시쯤 퇴근하며 마무리를 하겠다던 남편의 의도를 눈치챈 동료 로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전에 와서 작별인사를 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속 교실로 찾아와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 눈물을 쏟았다. 인사말이 가득 담긴 카드와 여러 가지 선물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가슴속이 복잡하게 가득했을 것이다.
은퇴 파티를 하자고 했을 때, 그런 것 필요 없다고 했던 남편이지만, 그래도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느냐고 내가 우겼다. 마침 이 지역에서 유명한 게, 던지니스 크랩 생물을 판다는 이메일이 왔길래, 그걸로 주문하는 것으로 파티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것과 함께 생연어도 함께 주문했다가 항구에 가서 픽업해왔다.
그리고 딸과 볼일 보러 나갔다가 샴페인을 하나 샀다. 프랑스산 진짜 샴페인 중에서도 꽤 괜찮은 것으로 심사숙고해서 골랐다. 남편이 좋아하는 샤도네로 만든 샴페인이었다. 은퇴 선물이니 평소에 쉽게 사는 것보다는 좋은 것으로 하고 싶었다.
집에 들어가서는 "은퇴 축하해!" 하면서 샴페인을 내밀었더니 환하게 웃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서 점심은 게를 삶아서 푸짐하게 먹고, 저녁은 연어와 샴페인으로 축하를 했다. 화려한 파티가 필요하지 않다던 남편이었지만, 이별의 허전함에 가라앉기보다는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축하하는 것이 더 좋다는 데에 동의했기에, 함께 많이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끔 있는 특별한 날에 남편이 차리는 정찬은 메뉴판도 만들고 풀코스로 준비하지만, 이번엔 남편이 앓고 난 후에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거창하게 하고 싶지 않은 남편의 뜻에 따라 최소한으로 준비했다.
그래도, 이번에 드디어 모자라는 그릇 두 개를 구해서 짝을 맞춘 본 차이나 식기에 담아서 상을 차렸다. 냅킨링과 은식기도 나왔다. 그리고 연어가 본식이기 때문에 색을 맞춰서 당근 수프를 준비했다.
간단하지만 배불리 먹을 만큼 준비되었고, 와인과 샴페인으로 흥을 돋웠다. 은퇴 후에 심심해서 학교로 복귀해서 보조 교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기는 절대 안 그럴 거라고 했다. 물론이지! 남편은 아마 영원히 심심할 새가 없는 사람일 것이다. 남편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가 모두 그러하다.
학교 이야기를 하며 가끔씩 눈물이 핑 돌기도 했지만, 많이 웃는 시간이었다. 특히나 딸아이는 남편이 멜랑콜리 해지지 않게 적절한 순간에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웠다. 원래 우리 세 사람의 농담 코드는 완전히 잘 맞기 때문에 손발이 척척 맞아서 많이 웃었다.
마지막으로 디저트는 딸아이가 만든 쇼트 브레드 쿠키와 브랜디 뿌린 케이크로 정리했다.
배 두드리며 먹는 메뉴는 아니었지만, 적절히 기분 좋고 잘 먹은 저녁이었다. 무엇보다도 남편이 이제 다시 정상적으로 음식을 삼킬 수 있음에 감사했고,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에 감사했다.
힘든 시간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하고, 남편이 뜻하는 대로 일을 하여 그만큼의 성과를 이루었음에 감사하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서 가슴 벅차게 감사하는 저녁이었다.
다 정리하고 잠자리에 든 시간, 남편은 조용히 말했다.
"오늘 저녁 시간 고마웠어. 당신이 우겨서 한 저녁식사였는데, 하길 잘한 거 같아. 고마워."
우리는 고맙다는 말을 원래도 자주 하는 부부였는데, 요즘은 부쩍 더 많이 한다. 삶이 벅찰 만큼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사실을 더 크게 실감하기 때문이리라.
이제 남편 은퇴 후 시작되는 제2의 인생, 더욱 소중하게 감사하며 살아가리라.
남편이 일했던 학교에 관한 이야기는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싣고, 브런치에도 함께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