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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Sep 19. 2022

나눠 먹고 사는 것에 익숙해지기

동물들도 함께 사는 이곳

호박이 주렁주렁 달렸다. 올해 호박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정말 씩씩하게 잘 자라서 온 뒷마당을 다 헤매고 다닌다. 고맙게도 맷돌호박이 듬직하게 다섯 개나 달려서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매일 보면서 나는 마냥 흐뭇했다. 처음에 작았던 녀석들이 점점 커져가다가 슬슬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누렇게 완전히 익어서 수확할 날을 꿈꾸며 기쁨에 들떴더랬다.


익어가던 호박 (사이즈 비교를 위해 오이를 얹음)


호박은 곁순 정리를 안 해주면 정말 감당할 수 없을만큼 퍼진다. 맷돌호박도 이렇게 번지고, 조선호박도 똑같이 번진다. 정말 거침없이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데, 블랙베리 밭으로 과감히 들어가, 그 가시 따가운 블랙베리를 감싸고 올라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얘네들도 땅을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사는 것이다.


맷돌호박이 몇개?(왼쪽) / 블랙베리 밭까지 진출한 조선호박(오른쪽)


탐스러운 맷돌호박을 기대하다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 추세로 봐서, 딱 우리가 한국에 갔을 때 수확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누가 이 호박을 따주지? 서리를 맞으면 망가질 텐데, 그렇다고 미리 따기도 그렇고... 이웃집 여인이 물도 주고, 우리 집을 관리해줄 거니까 그녀에게 부탁할까 싶기도 했지만, 아이들 챙기고 바쁜 그녀에게 이것까지 부탁하기는 좀 그랬다. 게다가 이것은 전형적 한국 호박이니 그녀가 본다 해도 수확시기에 대한 감도 전혀 없을 테고...


남편 아들도 종종 와서 뭘 한다고 했는데, 그 역시 호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니 거기에 부탁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다가 고맙게도 그런 내 고민을 들어주겠다는 분이 나타났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분인데, 선뜻 와서 따주겠다고 했다. 그분도 텃밭을 가꾸시고, 농사를 잘 아시는 분이라서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어제 아침! 오전 내내 비가 오길래 마당에 안 나가다가, 느지막이 발을 내디뎠는데, 뒷산 기슭에 곰이 앉아있었다. 매일 지나다니는 녀석이라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뭔가 열심히 먹고 있는데, 이상해 보였다. 거기엔 먹을 것이 없는데... 그러고 다시 보니, 우리 호박을 따다가 그 위에 올라앉아 열심히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야, 그거 우리 호박이야!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먹는 곰! 우리가 경적을 울려대니 귀찮은 듯 일어나서는, 반쯤 먹던 호박을 입에 물고 어슬렁어슬렁 사라졌다.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내려가 보니, 아, 이런! 이미 우리 마당에서 이미 하나 싹싹 긁어먹고, 두 번째 것을 챙겨간 것이었다. (뒤집어 봤더니 맛있는 부분을 싹 긁어먹었더라)


호박줄기가 뒤집어져있고, 바닥에는 깨진 호박이 뒹굴고 있었다.


캐나다 비씨주 광역 밴쿠버에 있는 우리 집은 산골에 있는 집이 아니다. 밴쿠버가 서울이라고 친다면 우리 집은 일산쯤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주택가에 살지만, 차로 5분 거리에 고층 아파트도 있는 동네다. 우리 집 뒤쪽은 그리 크지 않은 그린벨트 지역이고 그 너머에는 또 큰 찻길도 있건만, 곰은 이렇게 우리 동네 주택들을 자기 집 드나들듯이 한다.


우리 집은 이렇게 곰의 산책로 중간에 있다. 텃밭에 물 주다가 마주칠 때도 있다. 바로 5미터 앞에까지 마주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동네 이웃의 한 여인은 데크에 앉아서 아기 젖을 먹이고 있었는데, 등받이 뒤쪽이 이상해서 쳐다봤다가 곰이랑 눈이 딱 마주쳤다고도 했다. 정말 곰 얼굴이 눈앞에 있었는데, 곰도 놀라고, 자기도 놀라고! 아기 엄마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실내로 들어왔고, 곰은 제 갈길을 갔다 하니 정말 더불어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즐리 베어와 달리, 흉폭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캐나다 흑곰은 일반적으로 온순한 편이어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드물다. 물론 아기곰을 데리고 있는 엄마곰은 예외지만 말이다. 어쨌든 엄청나게 힘이 세고, 영리하기 때문에, 순하다고 믿고 다가가서 함께 셀카를 찍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 지역은 큰길에까지 곰이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곰이 나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다.


팔을 크게 벌려서 몸집이 큰 것처럼 하고, 서서히 뒷걸음질 치면서 멀어져야 한다. 등을 돌리고 달려서 도망가면 먹이라고 생각하고 쫓아오기 때문에 절대 안 된다. 그리고 흔히 알려진 것처럼 죽은 척을 해도 안 된다. 곰은 죽은 동물을 먹기 때문이다. 


결국 다섯 개 중에 두 개를 빼앗기고, 나머지 세 개는 오늘 다 땄다. 이미 맛을 본 곰이 분명히 또 올 것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반드시 다시 온다.


제일 큰 게 6.7kg, 나머지는 대략 4.5kg 정도 되었다.


얼마나 벼르던 맷돌호박인데, 한국에서처럼 완전히 누렇게 될 때까지 익히지 못한 것이 못내 서운하다. 그리고 애지중지 하던 호박을 두 개나 잃었으니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자연을 누리고 싶다면 결국은 함께 살아야 하는 삶이기에, 이웃과 나눠 먹듯이 곰과도 나눠 먹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산을 깎아 집을 지은 이 밴쿠버 지역에서는 곰과 결국 더불어 사는 수밖에... 오늘은 이 호박을 잡아서 일부 말리고, 또 일부는 얼리고, 친구들도 오라고 해서 한 덩이씩 줘야겠다.


맷돌호박 3개, 조선호박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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