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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Aug 03. 2023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따뜻함

영국인 조카가 가족과 함께 다녀갔다. 나는 토종 한국인인이고, 남편은 캐나다인인데 어떻게 영국인 조카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조카는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다.


십 년도 더 전 어느 날, 영국의 한국문화원에서 일하는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참한 아가씨가 한국을 방문하려고 하는데, 어디 묵을만한 집이 있는지 좀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가격도 많이 비싸지 않으면서 안전하면 좋겠다고 하는데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그냥 우리 집에 오면 어떻겠냐고 하여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돈은 됐고, 딸내미 영어나 한 번씩 도와 달라고 했다. 밥은, 우리 먹을 때 집에 있으면 같이 먹는 걸로 하자고 했다. 


이 아가씨는 자기 몸 만한 배낭을 메고 우리를 찾아왔다. 첫인상이 아주 좋았다. 노인들이 늘 하는 말처럼, "요즘 젊은 사람 같지 않은" 정말 괜찮은 아가씨였다. 


차분하고, 상냥했다. 세상을 배우는 데에 의욕적이었고, 한국어도 열심히 배웠다. 뭐라고 부르면 좋겠냐고 묻길래, 고민하다가 '이모'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영국인 조카가 생겼다.


이름에는 값이 따른다. 이름값. 나는 그 이름값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이모처럼 굴었다. 아침에 늦잠 자면 깨워주기도 하고, 같이 도서관에 가기도 했다. 주말 아침에 딸과 조카가 나란히 앉아서 아침을 먹으면, 내가 옛날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젊었을 때 이야기, 어릴 때 이야기들을 두 아이가 눈을 초롱이며 들었다.


만두를 빚고 있으면 쪼르르 와서 같이 만들었다. 찌개를 끓이려고 김치를 썰고 있으면 뒤에 나타나서는 "음~ 냄새 좋다!"라고 말할 만큼 한국음식을 즐기는 그녀를 보며, 전생에 한국인이었나 보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던 나의 영국인 조카는 한국에서 석사도 했고, 책들도 번역하고, 한국인 청년을 만나 결혼도 했다. 꼭 자기처럼 진솔하고 착한 청년이었다. 화사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머금은 첫인상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세월이 가서, 지금은 토론토에 살며 아기도 낳았다. 나를 드디어 할머니로 만들어 준 이 예쁜 아가를 위하여 퀼트를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그녀의 결혼식 이후 딱 한번 만나고는 각자 살기에 바빠서 가끔 문자만 주고받았는데, 그녀가 갑자기 밴쿠버 일정을 잡았다. 휴가일정이 급하게 잡혔다고 하는데, 하필이면 우리의 샌프란시스코 방문과 겹치게 된 것이었다. 못 만나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서로 날짜를 잘 조절해서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에 먼저 우리 집에 짐을 풀고 여행을 하다가 우리가 돌아오면 함께 지내자는 계획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자기네 가족이 있으면 우리기 힘들지 않겠냐고 했지만, 우리는 모두 가족이니 괜찮다고 대답해 줬다. 그래, 가족이잖아, 조카인걸! 


그렇게 그들은 밴쿠버에 먼저 도착해서 여기저기 여행을 하고 며칠 후에 우리 집에 짐을 풀었고, 우리는 그러고 나서도 또 며칠 있다가 집에 도착했다. 자정이 넘어서 도착하는 바람에 인사는 아침에야 할 수 있었다.


아침에 차 시동 거는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아이 아빠는 렌터카를 반납하러 일찌감치 나갔고, 거실에서는 귀여운 꼬물거리는 소리가 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마당으로 나가서 산딸기를 따고 있었는데... 조카와 그 아기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말벌집을 밟은 것이었다. 


몸에 붙은 말벌들을 급히 떼어내고 아이를 안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비명소리에 놀란 남편도 뛰어나오고, 첫인사를 그렇게 황망히 나누었다. 다행히 아이도 벌에 알러지는 없었고, 우리는 약을 바르고, 동종요법 약을 먹으면서 서서히 진정을 시켰다. 응급실로 달려가야 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정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우리는 며칠간을 함께 보냈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는 매일 놀이터에 나가야 했기에 가까운 공원을 섭렵했고, 다 함께 블루베리를 따러 가기도 했다. 


블루베리 따러 갔던 날


조카의 아이니까, 나는 이모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 그렇게 길게 부르지는 못하고, 나를 그냥 이모라고 불렀다. 미소가 너무나 예쁜 아이는 "이모 어딨어?"를 연발하였고, 나는 아이과 깔깔거리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남편은 날더러 정말 할머니가 되고픈 모양이라고 놀리는데, 나는 진지하게 "난 준비 되었다구!"라고 말해서 다들 웃었다. 


내 조카는 영국인이지만 한국 음식을 좋아하니 식사는 거의 한식으로 이어졌다. 사실 아이 데리고 유학생으로 살다 보면 제대로 식사를 해 먹기는 쉽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우리는 되도록이면 잘 먹이려고 애를 썼다. 미안하니 외식을 하자는 제안도 해왔지만 결국은 다 집에서 해 먹었다. 


오랜만에 조카가 놀러 왔으니 이모가 잘 먹이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바쁜 삶 속에서 이렇게 휴가를 왔으니, 무엇 보다 휴가처럼 보내게 해주고 싶었다.


삼겹살도 굽고, 된장찌개도 끓이고... 부대찌개와 녹두전, 잡채, 제육볶음 등등의 한식 메뉴를 차렸고, 남편이 준비한 연어 바비큐 구이도 등장했다. 밴쿠버에 왔는데 사카이 연어를 대접 안 하면 안 된다는 남편의 주장이 탁월했다. 식사는 아주 히트였다. 특히나 꼬마 손님이 어찌나 잘 먹던지!


아이를 번갈아 재우는 그들은, 또 번갈아 나와 함께 마당에 앉아서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눴다. 조카도, 조카사위도 진솔하게 대화에 임했다. 아이 키우는 것이나 일에 관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또 내가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살아보니 이렇더라는 내가 하는 노인네 같은 말들을 귀담아듣고, 또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들이 참 고맙기도 했다.


그렇게 휘리릭 시간이 흘러 떠나는 날이 왔다. 


배웅을 하면서 세 사람을 모두 꼭 안아주었다. 그녀가 나의 조카가 되었으니 조카의 신랑도 가족이라고 말해주었고, 그러니 우리 앞으로도 또 편안하게 만나자고 했다. 세상살이가 쉽지 않은 순간들도 많겠지만, 행복하고 즐겁게 살라고 말해주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해졌다. 


세상에 인연은 참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은 참 따뜻하다.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가족도 많다. 새 식구가 들어온다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가족 울타리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나처럼 이렇게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가족을 얻기도 하는데, 이렇게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참 행운이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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