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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Nov 13. 2023

일년 후에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내일 멸망하는 것보다 희망적인 설계를 꿈꾸다

딸이 출장 중이다. 학생이 무슨 출장이냐 싶지만, 자기가 하는 일 때문에 간 여행이니 출장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한국도 다녀온 딸이 또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간다니 너무나 사치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여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는데 말이야. 도대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딸은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대학원에서 과제로도 만들지만, 과제가 없어도 만든다. 이제 애니메이션 만들기는 아이의 중요한 본업이다. 이렇게 만든 영상은 영화제에 제출한다. 뭔가 상을 꼭 받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작가로서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개념이다.


영화 만드는 사람들에게 있어 영화제 출품은, 화가들이 전시회를 여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활동을 인정받아야 예술가 비자도 받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남들이 어떻게 보고 느끼는지를 알게 되는 중요한 기회이기도 하다.


올해에는 가상현실 체험 시스템인 VR을 이용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3D와는 또 다른 세계다. 전용 헤드셋을 쓰고 볼 수 있는 영상을 만든 것이다. 즉, 작업은 평면으로 하지만, 이 작업을 이 헤드셋에 넣으면, 360로 돌아가는 영상이 되어버린다.


관객은 헤드셋을 쓴 채로 가상현실로 들어가 영상 안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진짜로 그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영상 속에서 펼쳐지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주인공이 내 옆으로 휙 지나간다. 관람객도 주인공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그가 가는 곳을 쫓아간다. 흔히 게임에서 많이 사용되지만, 이 VR이 영화의 세계에 들어온 것은 아직 초반의 단계이다. 즉, 상당히 실험적이라는 얘기다.


딸은 이 방식의 장점을 최대한 잘 살려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봄학기 내내 애를 써서 만들어진 작품은 교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인기를 끌었고, 아이는 이 작품을 몇 군데 영화제에 출품했다.


그중에서 영국 요크(York)에서 열리는 애스테티카 단편 영화제(Aesthetica Short Film Festival)에 선정이 되었다. 사실 제법 큰 영화제이고 선정된 작품수도 엄청나게 많은데다가, 애니메이션보다는 일반 영화가 지배적인 곳이라, 선정되었다고 해서 꼭 직접 참석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지 않아도 아이의 작품은 그곳에서 상영될 것이다.


영화제 웹사이트 : 온라인 브로셔가 280페이지에 달한다


이전에도 몇몇 영화제에 선정되었지만 모두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은 갔지만, 그렇지 않으면 모두 참석할 수는 없다. 그리고 자신이 빠진다고 해도 아무도 의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영국에서 열리는 이 단편 영화제에는 어쩐지 꼭 가고 싶어 했다. 한국행 티켓을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또 비행기표를 산다는 데에 대해서 딸은 상당히 부담감을 느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내게 상의를 해왔다.


나는 대답해 줬다. 


네 좌우명이 뭐야?
일 년 후에 세상이 끝날 것처럼 살겠다는 거 아니야?

그렇다. 딸의 좌우명은 이거다. 당장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용기를 갖기는 힘들겠지만, 그게 일 년 후라면, 그 순간이 다가왔을 때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 해 살겠다는 말인 것이다. 


일 년 후에 세상이 끝난다면, 지금 망설이지 말고 영국행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물론 안다. 딸이 가난한 고학생이고, 혼자 생활비를 버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다. 엄마 역시 이렇다할 재산이나 대단한 수입이 있는 게 아니라서 돈을 척척 대줄 수 없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 딸은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너 힘들면 아직은 보태줄 수 있는 돈이 조금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 미래의 네가 후회하게 만들지 말고."


그렇게 해서 딸은 영국행 비행기표를 샀다. 그러고 나자 바로 근처에 있는 맨체스터(Manchester)에서 열리는 영화제에서도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정을 하루 늘려, 비행기표 한 장으로 두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학교를 그 이상 빠질 수는 없어서 두 번째 행사는 하루만 참석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맨체스터 애니메이션 영화제 웹사이트와 VR 소개 페이지


영화제 주최 측에게도 가겠다고 연락을 했다. 요크의 단편 영화제에서는 행사는 5일간 진행되며, 행사의 종류도 다양했다. 


감독들을 모아놓고 질문을 하는 토크쇼를 하는데, 패널이 되길 희망하는 사람들은 신청하라고 했다. 포스터를 전시할 예정인데, 장소가 협소하니 포스터 디자인을 보내주면, 그중에서 선정을 하겠다는 연락도 왔다.


고맙게도 딸아이가 신청한 그 두 가지에서 모두 오케이 사인이 왔다. 영국에서 세 번째로 큰 영화제라고 했는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아이는 어리둥절하고 신이 났다. 


딸 작품 포스터 : 오른쪽 위


학교 스튜디오 PD이니 그곳에서 해야 할 일도 많고, 영국에서의 체류비 걱정도 있으니 마냥 넉넉하게 일정을 잡을 수는 없었다. 비행기표는 최대한 빠듯하게 샀다. 아이가 도착하는 아침에 토크쇼가 진행되는 일정이었다.


마냥 들떴던 딸은, 뉴욕에서 비행기를 갈아탈 때, 보안검색대 줄이 돌연 너무 길어서 비행기 놓칠까 봐 속이 새까맣게 탔고, 그다음에는 비행기가 제시간에 출발을 안 해서 또 속이 탔다. 맨체스터 공항에 도착해서 요크까지 가는데 두 시간이나 걸리니, 자칫하면 토크쇼에 못 갈 수도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7시에 공항에 도착해서 9시 반까지 행사장에 가는 것은 무리한 계획이었다. 공항에서 바로 우버를 탔으면 늦지 않았겠지만, 또 돈이 걸리는지라 기차를 타러 기차역에 가고, 티켓을 사는데 갑자기 카드가 안 되고, 우여곡절을 거쳐 간신히 기차를 탔는데, 요크 기차역에 도착하면 이미 9시 40분이었다.


딸아이는 어깨가 축 처져버렸다. 자리도 없어서 간이 좌석에 간신히 구겨져 앉아서, 거울도 못 보고, 옷도 못 갈아입고 밤샘 비행기로 피곤에 절어 우울해졌다. 토크쇼는 10시 반에 시작이었지만, 9시 반부터 감독들이 모두 모여서 말을 맞춘다고 했는데, 제대로 참석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원래 옷도 갈아입고 근사하게 등장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A-Z... 영화 제작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감독들의 토크쇼 일정도 들어있다


그런 딸에게 나는 네 모습을 제삼자의 모습으로 보라고 말했다. 네가 불쌍해 보이냐고 물었다. 영화제에 선정되어서 영국까지 왔고, 곧 토크쇼에 작가 및 감독의 모습으로 참석할 네가 불쌍하냐고 말이다. 딸은 웃었다. 투덜대는 자신의 모습이 재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같이 웃었다. 


기분이 나아진 딸은, 기차마저 연착해서 거기서 다시 10분 이상을 걸어가느라 30분가량 늦어버렸지만, 그날 하루를 멋지게 소화해 냈다. 늦어서 정말 미안하다는 딸에게 그들은 따뜻한 커피를 내어주며 환영해 줬고, 토크쇼는 그럭저럭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오후에 누군가가 자기에게 다가와서, 자기가 토크쇼 봤다며 알은체를 했단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다는 그의 말에, 딸아이는 오히려 누군가가 정말 자신이 말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들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자신의 영상을 볼 수 있는 곳에 들러서 소리를 점검하였고, (헤드셋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설전시장 같은 곳에 가서 볼 수 있다), 입장권을 계속 새로 사서 3번이나 봤다는 사람을 만났다고 놀라워했다. 


작품을 처음 구상할 때에는 나름 기발하다 생각해서 시작하지만, 하다 보면 스스로 지쳐가고, 과연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 것인지 자신감을 잃어가기 쉽다. 그리고 그 장면을 백만 번씩 돌려보다 보면 제대로 된 판단력을 잃게 되는데, 남들이 내 작품을 가지고 감탄한다면 그보다 더 짜릿한 순간이 어디 있을까 싶다.


사실 이 영화제는 애니메이션이 메인이 아니고, 실사 영화가 대부분인 영화제이다. 길이도 훨씬 긴 것도 많고, 작품 수도 엄청나기 때문에, 단 6분짜리 짧은 영상을 제출해서 이목을 끌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우리 딸은, 사실은 자기도 영화제를 즐기러 간다는 마음으로 간 것인데, 생각지도 못한 호평을 받아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출처 : https://www.instagram.com/catchat42/


딸아이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이 카툰을 보면, 딸이 정말 저렇게 깜짝 놀랐을 것이라는 것이 눈에 선하다. 영화제에 온 영화과 대학생 그룹이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딸아이의 이름표를 보고 감독인 것을 알고는 무슨 영화를 만들었냐고 물어봤단다. 딸아이는 당연히 그들이 자기 영화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아주 캐주얼하게 "올챙이라는 거 있어."라고 했는데, 실제로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감동을 표했다고 했다.


결국은 딸이 명함을 주었고, 그 학생들은 심지어 뒷면에 사인을 해달라고 해서 얼떨결에 사인까지 해주고 나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싶다. 


모든 일이 이렇게 술술 풀리는 와중에 딸아이는 몸살이 심하게 걸리고 말았다. 급히 여행가방을 싸느라 감기약 하나도 못 챙겨서 고스란히 앓고 있다고 말했다. 엄마로서는 그게 너무 짠하고 안쓰러워서 걱정을 했더니 딸아이는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와서 몸만 에너지가 넘치고, 행사가 지루한 것보다 그래도 저는 이게 더 좋아요!"


그래, 엄마도 네가 너의 꿈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이 보여서 정말 기쁘다!



표지사진 : 딸아이가 제작한 티셔트 뒷면의 글씨. 내년이 없는 것처럼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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