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슈에뜨 La Chouette Feb 23. 2024

대보름 번개 칠까요?

나물 한접시 파티

캐나다에서 한국 명절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설날도 공휴일이 아니니 잊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은 현실이다. 그저 미안하니까 떡국이나 끓여서 먹으면 잘 챙기는 수준이다. 식당에서 사 먹고 넘기기도 한다. 매년 챙기던 나도 올해는 그냥 간단히 떡국 끓이고 잡채와 전 부쳐서 가볍게 넘어갔다.


그런데 대보름은 이상하게도 그냥 넘기기가 더 싫다. 그러면 대보름 번개를 칠까?


사실은 설날 때 번개 쳐서, 다 모여서 함께 떡국 끓여 먹자 하려고 했는데, 어영부영 날짜기 지나가서 못했고, 그래서 대보름은 수강생들 불러서 나물 먹자고 하면 반응이 어떨까 싶었다. 혼자서 나물 여러 가지 하려면 하기 싫겠지만, 다들 한 가지씩 해서 모여서 나눠 먹으면 그 맛이 좋지 않겠는가 했더니, 다들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번개가 형성되었다. 무슨 나물을 맡을까 서로 의논을 했다. 자신 없는 이는 시금치나물처럼 쉬운 것을 선택하겠다고 했고, 좀 노련한 분은 오곡밥을 선택하기도 했다. 혹시 못 올지도 모르겠다는 사람은 부럼을 맡았다. 안 와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항목이었다.


나는 기다리며 눈치를 보다가, 남들이 선택하지 않은 항목으로 추렸다. 아무래도 묵나물은 많이들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고사리와 고구마순, 토란대 같은 것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한인마트에 갔는데, 어이없게도 말린 고사리가 없었다. 지금이 팔아야 하는 대목이 아닌가? 


하는 수 없이 토란대와 무말랭이를 집어서 돌아 나오는데, 직원이 따라오더니 냉동 고사리가 있는데 그거라도 쓰시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얼린 것은 좀 질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래도 구색을 갖추고 싶어서 집어 들었다. 

얼린 고사리는 질기진 않았지만 좀 쓴맛이 났다


오곡밥도 양이 적을 것 같아 내가 좀 더 해서 얹어야겠다 싶어서 봤더니 콩은 왜 이렇게 봉지가 큰지! 흑태는 좀 작은 사이즈가 있었지만 나는 서리태를 넣고 싶어서 결국은 또 큰 봉지를 집어 들었다. 장을 보다 보면 물건은 계속 늘어나게 되어있는 법이다.


학생들은 하나씩 해오라고 했으면서 나는 왜 여러 가지 하느냐 묻는다면, 일단 나는 나이가 많으니 이런 것들이 좀 익숙하고, 아이가 없으니 더 수월하지 않겠나. 그리고 원래 뭐든지 나는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력이 좀 더 되는 사람이 더 하는 것이 세상이 잘 흘러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 집에 모여서 함께 대보름 잔치를 한다면 당연히 내가 더 신경을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마당에 나갔더니, 쑥이 막 올라오기 시작했다. 쑥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쑥쑥 번진다. 그래서 땅에 심으면 안 되고 원래 화분에 가둬서 키워야 하는데, 우리는 뒷산 기슭에 자리를 잡아서 어찌나 잘 자라는지! 매년 나눔을 해도 또 넉넉히 나온다.


그래서 이왕이면 대보름에 오는 손님들에게 쑥뿌리도 캐어 주겠노라고 말했다. 스티로폼 박스 구해다가 흙 채우면 베란다에서도 어렵지 않게 키울 수 있고, 쑥은 죽지도 않는다. 아주 쉬운 작물이다. 그리고 더불어 깻잎과 쑥갓 씨앗도 함께 챙겼다.


봄이 오는 마당, 헬레보어도 예쁘게 피었다


모임 당일에는 오전 내내 수업이 있기 때문에, 나는 전날 바빴다. 팥은 씻어서 삶았고, 다른 재료들은 계량만 먼저 해뒀다. 콩은 밤에 자기 전에 물에 담가 불렸다. 쌀은 아침에 불릴 생각이었다.


건나물은 삶아서 불렸다. 재료가 부족하다 싶어서 뒤졌더니 재작년에 말려놨던 무청이 나타났다. 그것도 삶아서 불렸다. 



나물을 볶을 때에는 멸치 육수를 만들어 쓰는 게 보통인데, 이번엔 사골국물을 썼다. 며칠 전에 사골을 끓여서 쟁였기에 그때 미리 일부를 얼음통에 냉동을 해놨던 것을 꺼내서 사용했다.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모든 음식이 풀밭이었다. 비벼 먹으려면 단백질도 좀 있어줘야지 싶어서, 냉동실에 있던 다짐육도 재웠다.


준비를 완료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 후다닥 밥을 안칠 준비를 해놓고, 수업에 들어갔다. 나머지 정리는 남편이 해줬다. 식탁을 펼쳐서 많은 인원이 앉을 수 있게 해 주고, 정리가 안 된 부분을 마무리해줬다. 


밥도 내가 나와서 불에 앉힌 후에는 불조절을 해주고, 소고기도 볶아줬다. 남편은 내가 하는 일을 언제나 적극적으로 도와주니 이럴 때에 정말 고맙고 든든하다. 


수강생들은 시간 맞춰서 도착했다. 각각 싸 온 나물과 오곡밥을 펼치고, 후식거리와 부럼도 같이 꺼냈다. 순식간에 상이 차려졌다.



모자라지는 않을까 동동 구르는 마음이었는데, 음식은 아주 넉넉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 캐나다 생활이 오래되지 않은 멤버들이어서, 캐나다의 문화와 한국 문화의 차이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를 나눴다.



밥을 좀 많이 펐나 싶었지만 어찌나 꿀떡꿀떡 잘 넘어가는지! 


후식상도 펼쳐졌는데,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그 이후는 사진에 담지도 못했다. 멤버들 사진은 남편이 찍어줬지만, 초상권 보호를 위해서 그건 올리지 않았다. 


남편은 다들 편히 먹으라고 자리를 비켜줬고, 가끔 등장해서, 뭐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 물었다. 그리고 수강생들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디오북을 듣는 기분이라고 말해서 웃음이 터졌다. 내가 사용하는 교재는 남편과 딸이 녹음한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그 말이 재미있었다.


나는 모든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성격이다. 비록 잠시 캐나다에 왔다가 떠나는 기러기 엄마들이 대부분이지만, 낯선 땅에 와서 지내는 동안, 그래도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서로 의지하며 살면 좋겠다 싶다. 영어를 가르치지만, 그냥 수강생과 선생님이 아니라 따뜻한 이웃이고, 또 언니같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사람 사는 것 같이 살고 싶다. 그런 내 마음을 같이 느껴주고, 이렇게 함께 해주니 참으로 고맙다.


덕분에 나도 대보름 나물과 오곡밥, 부럼을 즐겼고, 또한 이 맛을 잘 아는 이들과 함께 먹어서 더 좋았다. 다들 많이 웃었고, 다음에 만나자며 씨앗과 쑥뿌리를 나눠 들고 총총히 헤어졌다. 다음번에는 날씨가 풀려서 마당에서 있으면 좋겠다. 




나물 레시피는 작년에 올린 것이 있어서 다시 적지 않았습니다. 필요하신 분 참고하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렌틸콩 퀴노아로 또띠아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