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허니문, 그 발단
딸 대학 졸업식을 마치고 그와 내 딸,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당연하다는 듯 같은 호텔 방에서 잤다. 밤늦도록 와인을 나누고, 같이 웃다가 훌쩍이다가 그러면서 서로가 얼마나 쿵짝이 잘 맞는지 경이로워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졸업을 위한 축하도 있었지만, 심신이 지쳐있던 딸아이에게 속을 열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고, 세 사람은 마치 평생 셋이 같이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시간을 나눴다.
그간 고단했던 아이는 아침이 되었어도 정신없이 자고 있었고, 나이 든 커플은 당연히 잠에서 일찍 깨어나서 내려가서 호텔 조식을 마치고, 캠퍼스 근처를 산책했다.
바깥 외출을 자주 하지 않던 우리에게, 이 작고 귀여운 도시에서의 산책은 참으로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손을 잡고 걸으면서 가게들을 기웃거리고, 장난치고, 웃고... 작고 귀여운 가게들이 늘비한 그곳에서 마치 어린애들처럼 경쾌하게 아침 공기를 마시며 걷는 순간 아무도 부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물었다. 여름에 뭐 하고 싶은 거 있느냐고... 뭐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어딘가 가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아무런 계획도 세운 적이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이어서, "유럽에 가면 어떨까?" 라며 나를 쳐다봤다.
유럽.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 것이 유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함께 유럽을 갔던 것은 아니었지만, 각자 방문했던 유럽에서, 우리는 각자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다시 물었다.
"Will you look after the time there if I get us to and from?"
"내가 티켓을 끊으면 당신이 그 사이를 준비할래?"
그럼, 할 수 있지! 여행 계획 짜는 게 어디 한 두 번 해본 일이겠어? 그러면서 머릿속에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지? 무엇부터?
그는 직장 때문에 먼저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아이의 졸업 뒷정리를 마저 도와주느라 일주일 정도 더 그곳에 머물렀다. 모두 마치고 돌아오니, 그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정말 유럽에 가고 싶은지 다시 물었다. 정말 한 달이나 간다고? 가족들 모아서 결혼식도 해야 하고, 할 일도 많고, 돈 들어갈 곳도 많은데 정말 한 달 동안 갈 거냐고 나는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러면 일단 가는 티켓부터 사자고 했다. 오는 날짜는, 일정을 짜 보고 정하자고. 어차피 왕복으로 사는 게 더 싸지도 않으니까.
베란다에 나가서 와인을 곁들여서 시가 한 대를 피고 들어온 그가 말했다.
I bought the return tickets too.
돌아오는 비행기표도 샀어.
무엇이든 속전속결하는 그는, 결혼식 준비도 그랬듯이, 허니문도 화끈하게 결정을 내렸고,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일주일 후면, 결혼식때문에 식구들이 모두 와서 정신없을 텐데, 그 준비는 언제 하고, 여행 준비는 언제 한단 말인가!
일단 일정부터 짜야하는데, 유럽 어디를 갈까? 어디를 가고 싶어?
그가 가장 원하는 곳은 파리였다. 내가 처녀시절 유학 가서 고생하던 그곳. 내가 외롭던 그곳에 가서 그때의 그 힘듬을 달래주고, 잠시나마 젊은 시절로 돌아가서 부족했던 것을 채워주겠다고. 그리고 내가 보냈던 엽서의 그 장소에서, 내가 원하던 그 키스를 해주겠다고...
빛바랜 이 엽서는 유학시절 파리에서 구입했던 것이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구입해놓고 수십 년간 잊은 채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가, 근래에 이사하느라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며 다시 발견하고 감회에 젖었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나러 오기 전 그에게 이 엽서를 써서 보냈다. 그때, 사랑이 충만한 파리에서 이런 낭만적인 키스를 해보고 싶었다고... 하하! 정말 이 파리 시청 앞에서 노년의 키스를 하게 될까?
그리고 또 가고 싶은 곳은 이탈리아. 딸아이가 로마 교환학생 하던 당시에, 생일 선물 뭐 받고 싶냐고 묻던 그의 질문에, 아이는 로마로 자기 만나러 와 달라고 했었다. 정말 원해서 한 부탁이었지만 그가 너무나 흔쾌히 응해주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는 아이가 사랑하던 멘토 선생님이었고, 그 역할을 그 누구보다 잘해주었던 그는 자신 휴가 기간에 아이를 방문해서, 정말 부모 같은 마음으로 아무 바라는 것 없이, 아이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먹이고, 산책하고... 그렇게 열흘을 보냈다. 그 후에 내가 그에게 보냈던 감사의 편지가 결국에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은 의도하지 않았던 그 일이 씨앗이 된 셈이었으니, 로마는 그들의 사랑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며. 아이와 그가 함께 마티니를 마셨던 그 바에 같이 가고 싶다는 것은 둘 모두의 의견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로마,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돌기로 결정하고 아쉬움이 남아서, 파리 말고 다른 프랑스 원하는 곳은 없느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던 주노 비치(Juno Beach)를 가보자고 했다. 그래서 노르망디 가는 김에 에트르타(Étretat)까지 가기로 결정을 하니, 일정이 벌써 가득 찬 느낌이었다.
주노 비치는 그의 아버지가 해군 시절에 가셨던 곳이어서 그에게 의미가 있었고, 에트르타는 내가 유학시절 방문했던 곳이었다. 젊을 때 사진을 오래된 수첩에서 발견하고 편지에 담아 그에게 보냈었는데, 그도 그 사진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이 상당히 훼손되어있었는데, 아마도 수첩에 끼워 다니면서 물에 젖어서 번진 것 같다.
가난하던 시절, 한국에서 유학 온 어린 학생을 주말에 맡아주면서, 그 엄마의 부탁으로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행의 의미는 무엇일까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면, 뭔가를 많이 보고 기억하고 공부하는 것보다는, 그 안에 얼마만큼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인 것 같다. 이제 치열하게 여행 준비를 시작해야 하겠지만, 그리고 그 과정이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준비해서 가게 되는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추억을 만들고 오고 싶다.
그들의 이야기, 황혼의 허니문... 나이가 들어서 더 여유롭고 편안한 이야기가 되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