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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Jan 16. 2020

내 탓이오?

정말 이게 정답일까?

내 탓이오. 이 말은 무슨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 탓을 하지 말고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좋은 의미의 말이다. 그래서 문제해결력의 열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그렇게 모든 문제에 효과적일까? 


물론,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찾아보려면 일단 스스로에게서부터 찾아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잘못된 선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잘못된 처신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잘못된 판단에서 왔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함부로 타인을 비난하거나 탓하거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어디선가 내가 잘못한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정말 내 "탓"일까? 그렇게 내 탓을 하면 그것이 개선될까?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많은 문제들의 근원은 의외로 나의 밖에 있다. 그리고 내가 개선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것을 늘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면, 그것은 자존감의 상실과 비참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 예를 들면, 내가 이혼을 한 것은 분명히 내 탓이 맞다. 내가 처음부터 내게 맞지 않는 사람을 선택한 것은 분명히 내 탓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고 내 탓을 하면서 그것을 감당하고 평생을 고통과 반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처음부터 내가 선택을 잘못하고 있다고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선택을 하던 당시에는 대부분 맞는 선택이라 생각했을 테니까. 아니면, 내 친구처럼, "이게 아닌데,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싫다." 하는 생각을 했어도, 그 당시 사회 분위기상 그것이 용납되기는 어려웠기에 피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친구는, 이 결혼은 행복하지 않을 거 같으니 파혼하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으나 심하게 꾸지람만 들은 채 결국은 결혼식장에 들어갔고, 30년 가까이 힘겨운 삶을 살아오고 있다. 처음에는 힘들어도 씩씩하게 견뎠고, 관계를 개선해보려고 애도 많이 썼으며, 자신을 바꿔보려고도 노력했고, 잘 호소해서 상대방을 바꿔보려고도 노력했으며, 그도 저도 안 되니, 그저 자식들 때문에 꾹 참고, 싫은 것도 맞춰 가면서 살았지만,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인내심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결국 그 시기가 빠르거나 늦거나 언젠가는 곪은 것이 터지게 마련이다. 그 친구는 지금 말한다, 그게 자신 탓이라고. 자신이 그때 그래도 완강히 거부했어야 했다고... 맞다, 하지만 그것은 맞는 해결책이 아니다.


살아오는 과정에 물론 행복이라는 것도 가끔은 있었으리라. 그리고 자식들이 기쁨을 주기도 했으리라. 참고 지냈더니 다정했던 날들도 조금은 있었으리라. "그래, 이 사람의 이런 면모를 보고 잘 살아봐야지" 하고 노력도 했을 것이다. "관계가 좀 개선된 것 같아."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관계는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할 뿐이라면, 이 문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에 직면했을 경우, 노력하는 것은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정말 노력했는데, 잘해보려고 했는데, 번번이 나쁜 결과를 만나게 될 경우, 그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에서도 자신감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생기기 쉽다. 애를 쓰고 참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이런 주변의 조언들과 서적들을 참고하며 나름 개선을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누구나 겪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런 노력으로 개선이 되기도 한다. 사실 사회는 서로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내가 노력하고, 상대방도 노력하고 그러면서 한 발씩 가까워지고, 그러면서 이해가 깊어진다면 분명히 참으로 바람직한 관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칠 수밖에 없다. 인내심이 바닥이 날 것이다. 절망이라는 것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곁에 있는 친구들이나 자식들을 보면서 이겨내던 일들이 점차로 더 어려워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돌파구를 찾아보려고도 노력을 해본다. 가요교실에 참여해서 목청 높여 노래를 해보기도 하고, 미술을 배워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아니면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열심히 하기도 한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먹방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그때뿐이다. 이런 방법들은 단기적으로 도움이 되고, 이런 장치가 아주 많이 있다면 확실히 이겨내기 더 수월할 것이다. 장기전으로 갈 수 있다면, 이런 장치가 그 과정을 무사히 넘기고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 이렇게만 살 수는 없다. 나는 다람쥐의 쳇바퀴를 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자괴감이 들기 쉽다.


아주 유능한 후배가 있는데, 아름답고 똑똑하지만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다. 성장과정에서 부모와의 관계도 좋지 못했다. 하지만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면서, 그저 이만하면 괜찮은 가정이라 생각하고, 자기 안의 아픔을 누른 채 그저 남편에게 맞추고, 트러블을 피하며 지내다가 결국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가정을 잘 돌보지 못하게 되니 주변의 손가락질이 날아왔다. 남편도 비난하고, 부모도 비난하고, 그저 나약하다고 또는 복에 겨워서 그런다고, 남들 다 하는 것을 너는 왜 못하느냐는 비난이 돌아왔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나쁜가 보다 생각도 했다. 죄책감이 들었고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것이 자신의 탓인 거 같았다. 


그러다가 결국 상담소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지금은 점차 좋아지고 있다. 다만 여전히 주변의 환경은 개선되지 않았고, 역시 같은 일들의 반복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긴 하다. 하지만 이제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비난을 받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예전 같은 우울감에서 많이 벗어났다.


photo by Eric James Ward


내 탓일까? 자신을 잘 돌아보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다른 곳에서도 이런 상황이었는지 검토해보자. 나는 분명히 그런 사람이 아닌데 계속 그런 상황에 놓여있게 됨으로 인해서 그런 사람처럼 판단되고, 그렇게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한 걸음 떨어져서 자신을 보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바라보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은 궁극적인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늘 원점으로 돌아간다.


내가 아무리 신발을 열심히 닦아도 계속 흙탕물 속을 걷고 있다면, 내 신발은 깨끗해질 새가 없다. 발은 젖고, 몸은 추워질 것이다. 그렇다고 발이 젖어서 시리다는 것을 내 탓으로 돌리지 말고,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지를 고민해보자. 장화를 신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여기를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금방 해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탓을 하면서 주저앉아서 울지 말고, 우선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다. 




정작 "내 탓이오"를 말해야 할 사람들은 모든 일들을 남 탓으로 돌리는데, 막상 나 자신만 나에게 너무 엄격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내 주변에 내가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비슷한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데, 그들이 스스로를 사랑하며 차근차근 다시 설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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