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다 Aug 19. 2023

내가 할머니 팬티를 입는지 알아도 내 마음은 모르잖아

나는 떡볶이 옆에 배고프다고 우는 아이 대신에 맥주를 두기로 했다.



20년 알고 지낸 게 무색하더라

오래 알고 지낸 지독한 20년, 10년 우정이라는 정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견되는 내 친구의 더 이상 외면 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부분이 있다. 어찌 표현할 수 없는 우정으로 용서될 수 없는 친구의 달라짐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한계가 있다.


베프, 친구라는 이름 속에서 때로는 친구라도 용서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의가 상하는 상황들이 있었다.

내가 위로를 바라고 말하는 말에는 우정이라는 애정이 담긴 말이 아닌 남보다 못한 비난의 조롱을 담은 말 한마디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의 실망감은 결국 우정도 다 별 수 없는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이 아닌 타국에 살다 보니 곁에 친구가 없이 살고 있고 우연이 유일하게 친해진 다른 도시에 있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면 이러쿵저러쿵 잘 맞아서 신난다. 오히려 알고 지낸 시간이 짧더라도 적당란 거리감이 있어서 서로 배려함으로 이뤄진 새 친구라서 제법 좋다.


같이 타국 생활을 하고 있고 어떤 일로 힘든 감정을 느끼는지 우리는 같은 시간을 겪으면서 알 수 있다.


새 친구는 비록 많은 것을 공유하고 나눈 사이는 아니라서 몸무게가 꽤 많이 나가는 내가 입는 팬티가 빅사이즈 전용이라 할머니 디자인의 고무줄 잘 늘어나는 꽃무늬 면팬티를 입는 사실은 모르겠지.




내가 할머니 팬티를 입는지 알아도
지금 내 마음은 모르잖아


20년 지기 친구는 내가 지금 100 사이즈 할머니 팬티를 입지만 지금 내 속마음이 어떤 일로 힘든지는 모른다. 이제는 이런 것을 공유하기 불편해진 사이가 되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오래 알고 지냈지만 만나면 본인이 만나는 남자 이야기만 영웅담처럼 풀어놓기 좋아하는 친구에게 내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민을 털어두기 싫어졌다. 나는 남자 얘기에 관심이 없으니까. 영양가 없는 말에 호응해 주기도 싫다.


지금 내가 짬뽕을 먹고 싶으면 탕수육도 같이 먹자며 소맥도 말아먹자며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비바람을 뚫고 술잔을 기울이며 맛있음에 감탄의 눈빛을 주고받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내가 해외생활을 하면서 사귄 유일한 한국인 친구다.


나랑 동갑이고 같은 커리어를 경험해서 공감대 형성이 빠르게 되었다. 새 친구는 내 팬티가 뭔지 몰라도 지금 당장 같이 할 수 있는 일에 마음이 서로 잘 맞는 존재다. 그래서 현재 나에게는 가장 좋은 친구는 이 사람이 아닐까.


​새 친구는 비록 내 팬티가 할머니들이 입는 고무줄이 쫙 늘어나는 꽃무늬가 그러진 촌스러운 팬티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어떤 한식당에서 어떤 음식을 먹으면 내가 행복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남자에 목숨 걸지 않고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는지 알아간다.


예전에는 알고 지낸 시간이 길어야 친구라 생각했고 그런 시간들로 맺어진 관계니까 나와 오래 알고 지낸 친구니까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친구라도 언제든 아닌 건 아니고 공감대 형성이 안되면 충분히 멀어질 준비가 돼 있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다 용서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내 친구들 곁에는 이제 남편들이 있다

또 물론이지만 멀어진 친구와는 어떤 계기로든 우리는 언제 든 다시 가까워질 준비도 됐다. 잠깐의 관계에 있던 공백이 지나온 우리의 좋았던 때까지 비워버리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내 곁에서 지금 필요한 때에 만날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다면 알고 지낸 시간이나 나이가 뭐가 의미가 있나 싶다.


서른 살이 되었고 친구의 의미가 달라지는 요즘이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주말에는 결혼식 모습으로 스토리가 가득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유식 만드는 장면들이 티브이 채널 돌리면 반복되는 재방송 드라마처럼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너도 나도 다 똑같은 이야기들 뿐이다.


결혼식 사진, 청첩장 전달하며 만나는 사진, 브라이덜 샤워, 임밍아웃이라며 초음파 사진을 올린다. 내 또래의 친구들은 지금 취업 이후 전형적인 인생 루틴을 살고 있다. 결혼, 임신, 출산의 일상들을 게시한다.


신혼여행 사진, 아기 초음파 사진들의 주체는 다른 사람들이지만 같은 상황들이 보인다. 스토리를 넘기면 이제 카페에서 커피 인생샷이라며 감성 사진을 올리던 시절은 없다. 키즈 카페에 가서 신난 아이들 사진만 가득하다. 이 나이 때에 경험하는 인생의 자연스러운 인간이 겪는 모습들을 내 친구들은 나와 다르게 겪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여행 가면 어떤 원피스를 살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딸에게 입힐 원피스가 어떤 것이 더 예쁜지,

주말에 어떤 감성 카페와 맛집을 찾아갈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떤 밥이 나오는 유치원을 보낼지 고민하듯이 나와 친구들은 고민의 일상거리가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이제 떡볶이를 위해서 나랑 같이 뛰지 않아

한편으로는 삼선 슬리퍼를 신고 쉬는 시간 종소리가 울리면 우사인볼트처럼 달려서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 먹고 철장으로 막혀있는 매점에서 손을 뻗어 돈과 피자빵을 주고받던 것을 같이 하던 내 옆에 친구는 이제 없다.


그 친구들 곁에는 이제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다. 조금은 씁쓸하다. 늘 내 곁에 있던 친구들에게 이제는 나랑 노는 것보다 가족들과 보내는 일상이 더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떡볶이를 먹으려고 같이 뛰지 않는다.

떡볶이를 먹으려고 같이 뛰는 사람도 다르고

뛰지 않고 차를 타고 가기도 하겠지.


나랑 다른 삶의 선택으로 추구하는 행복의 가치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가 같이 떡볶이를 먹었지만 이제는 떡볶이를 같이 먹을 옆에 있는 사람이 달라지는 때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고 친구는 친구니까.

그래도 우리가 떡볶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저 나는 떡볶이 옆에 배고프다고 우는 아이 대신에 맥주를 두기로 했을 뿐이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