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on Nov 06. 2022

겨울의 본색

서로의 안부라도 자주 물어줄 수 있길..

 돈 있으면 뭐 사고 싶었어요?"  

"음.. 겨울 코트? 가난은 겨울옷으로 티가 나요.

여름은 그럭저럭 남들 비슷하게 입을 수 있는데,

 겨울옷은 너무 비싸니까요."  

                                                    드라마 <작은 아씨들> 3부 중..


 날씨가 쌀쌀하고,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11월의 문턱, 올해는 유독 그 차가운 시림이 이른듯하다.

아직 가을의 단풍 구경도 시작해보지 못했는데 며칠 전에는 대관령에 폭설이 왔다는 얘기를 들으니 마음 한켠이 무거워진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느끼는 겨울이 주는 가난의 경험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드라마의 대사 속 표현처럼 여름은 어떻게든 덥고 땀나는 하루를 고만고만 잘 버텨보겠는데 겨울은 나약한 자, 병든 자, 외로운 자들에게 너무 혹독하다. 통장의 잔고가 가벼운 이들에게 한밤 중 콧김이 뿜어져 나오는 집안의 냉기는 나의 신세를 한번 더 비관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느끼게 한다. 여러 겹의 옷을 껴입으며 두꺼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몸을 웅크리고 자는 피곤함은 아침에 일어나 더욱 싸늘해진 방안 공기에 밤새도록 긴장하고 있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한기 없는 따뜻한 방에서 하루를 지내는 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 연료비 걱정 없이 한 계절을 지낼 수 있다는 안도감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아직도 새벽녘의 차가운 바람 속에 엄마를 따라 언덕길에 우유 배달을 하던 그때의 그 냉기가 너무도 싫다. 한겨울 미친 듯이 추운 새벽 시간 살얼음이 얼은 우유를 어린 손에 어울리지도 않는 목장갑을 끼고 어둑한 골목길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누군가와 마주치기 싫어서, 빙판길에 미끄러지기 싫어서 온갖 신경의 날을 세우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누군가의 집 앞에 두고 오던 나의 어린 시절 수치심은 그 해 겨울의 추위와 자연스레 연결된다.

 

 유독 가진 게 영 별로인 사람들에게 겨울은 그들의 가난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백화점에서 팔고 있는 천연 동물의 털이 잔뜩 들어가 있는 구스다운, 고급져 보이는 핸드메이드의 예쁜 코트들... 뒤집어 가격표를 살펴보면 정말 눈이 뒤집힐 가격들이지만, 내 경제력에 맞지 않는 그 옷들을 사기엔 너무 다른 세상 이야기라 처음부터 입어볼 욕심조차도 내지 않는다. 그나마 그 비슷한 디자인의 홈쇼핑 옷들을 여러 번 신중하게 살펴보고 쇼호스트의 과장스러운 설득에 홀연히 넘어가 '이 정도면 고급스럽다' 생각할 정도의 범위 안에서 나의 물욕에 구색을 맞춘다. 왠지 보풀이 난 니트티와 목이 늘어난 터틀넥을 입고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면 궁색하고 내가 더 초라해지는 것 같아 그 옷들을 가려줄 그나마 괜찮은 코트라도 하나 장만해 한 계절을 자기만족쯤으로 기분 좋게 나고 싶은 나의 마음은 매년 한 두 개의 중저가 외투에 돈을 써대는 나의 허영 값 인지도 모르겠다.


12월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 추수를 마친 황량해 보이는 휑한 논밭길을 산책하며 다시금 내 마음이 가라앉는다. 이제는 먹고사는데 큰 걱정 없이 내 밥그릇을 챙길 수 있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나는 어디에선가 한겨울의 칼바람을 맞고 있을지 모를 그 누군가의 안부가 걱정되는 계절이 된 것이.

한 겨울 우리 집 앞을 지키고 있을 어린 강아지마저도 신경이 쓰인다.




작가의 이전글 직장에서 나의 자존을 지키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