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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서 C Oct 07. 2019

욕먹는 회사에 다니는 기분

악어새는 사실 열매를 먹는다는데


- 떳떳한 일은 아니겠구나


허허실실 웃고 다니는 탓인지, 내 주변엔 직설적인 사람이 꽤 많다. 그중 유독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청와대 사랑채에서 일했을 당시 알게 된 지인 R이다. 그녀는 그곳의 전시를 구성하는 학예사였고, 복학을 이유로 내가 그곳을 그만둔 이후에도 꽤 오래 교류했었다.


이곳으로 이직 후 한 일 년쯤 뒤 모임에서 그녀를 만났다. 철새처럼 이직이 잦았던 나는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들에게 또 바뀐 직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는데, 회사명을 듣고 난 후 그녀는 떳떳한 일은 아니겠구나라며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다소 어이는 없었지만, 어쩐지 그 말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입에 여느 주변의 사람들처럼 필터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름 새로운 차원의 공격이었지만 그녀는 내가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 처럼 직업적 편견에 사로잡혀 나를 재단한 것도 아니었고, 다만 모른 척 외면하고 있던 내 한 구석 어딘가를 긁어대고 있던 것이다.  






학부시절 전공은 사회학이었다. ‘사회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은 ‘데모 좀 했어?’라는 고릿적 반응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내가 나고 자란 시대는 절대 대학생들이 시대의 지성도 정신도 아니었으며, 특히 사회학과는 학부 수준의 이해로는 얕은 잡지식만 늘어 ‘졸업 후 사기꾼이나 안 되면 다행’이라는 소리를 듣는, 심화되는 경쟁과 취업난에 허덕이는 ‘문송’한 존재들이었을 뿐이다. 특출 나지 않았던 나 역시 의식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군가의 말처럼 격동의 시기에 중립을 지키는 위험 분자에 가까웠다. 그런 나라도 젊은 혈기에 몇 번, 광우병 파동으로 시위가 한창인 광화문에서 양초를 사서 나눠주고 다니거나, 故장자연 사건이 터졌을 무렵 대본을 쓰고 공연을 올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오늘도 또 알바를 해야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내’가 우선이었고, 가치나 정치나 이념이나 모두 먹고 살 걱정이 나보다 덜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고경표는 극사실주의배우가 아닐까 (feat. 당시의 내 마음)


그런 처지의 나는 결국 어느새 취업이 꿈이 되고, 쫓기듯 사회에 나가 먹이사슬 하단에 위치한 존재가 되었다. 최근 몇년 사이 시끄러웠던 광화문에 나 역시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었긴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내가 더 우선인 것에 변함없다.



무관심과 무지함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시 몇 번은 시위에 나가던 학생이 정권이 바뀌지도 않은 때에 대통령 기념관에서 반년이나 월급을 타 먹었다. 그런 내가 법무법인에서 일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란말인가. 아마 지금의 성질머리라면 그녀에게 '선생님도 ***대통령부터 ***대통령도 대통령이라고 기념 전시하시잖아요? 떳떳하세요?‘라고 대거리를 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묵묵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을 뿐이었다.



포털에 노출된 대형 로펌에 대한 뉴스 기사에는 참 많은 악플이 달리곤 한다. 인간이었으면 무병장수도 할 것 같다. 매스컴을 수놓는 많은 사건들이 실제로 대형 로펌에서 많이 진행되지만, 대다수의 로펌비서들이 그렇듯, 나는 사건의 ‘내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대중들이 내용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더러 한다. 사실 업무에 익숙해지면 딱히 복잡하지 않은 절차적인 부분만 이해해도 업무에는 크게 무리가 없다. 그리고 담당하는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서면 하나하나 다 정독해가며 남 일에 필요 이상 열을 올리고 싶지 않다. 세상 쓸모없는 것이 연예인 걱정뿐이겠나. 여기서 벌면 얼마나 번다고 내 일만 하고 집에 가기도 바쁘다.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일 수 있지만 사건이 반박의 여지없이 1심에서 패소 후 종결되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신문지상에 노출되는 사건이 수임이라도 되면 그 사건으로 우리가 얻는 것은 오직 더 많은 업무량이라며 한숨을 푹푹 쉬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내용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떳떳하지 못한’일을 할 때,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한때 유명했던 '매너리즘 간호사 ',  아마 많은 직장인의 얼굴일 것이다  <출처 -  SBS 질투의 화신>



- 왜 지저분한 사건만 가져오는 거야


재직 중인 법인의 의뢰인은 주로 대기업들이다. 거대 자본(혹은 수임료를 감당할 만한 수준의 부유한 사람들)의 사적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공공의 이익과 가치에 상충하는 사건이 더러(?, 종종?, 자주?) 관찰된다. 로펌이 거론되는 뉴스 기사의 댓글에 번번이 등장하는 ‘돈이면 다 하는 양심 없는 것들’류의 댓글을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라는 말을 읊조리곤 한다. 그때마다 선배 Y가 떠오른다. 그녀는 좀 있는 집 자식들이 친 사고를 수임해오는 담당 전문가에 대한 불만을 후배들에게 자주 늘어놓았다. 다들 자기 일로 바쁜데, 들어주긴 좀 피곤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증거기록을 보는 것만도 찝찝해했던 그녀의 고충을 이해하긴 했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는 이 직업을 택하고 오래 종사해 온 그녀의 선택의 결과였다. 그 정도의 경력이면 염세주의에 찌들 만도 하건만 박차고 나갈 수 없는 처지에 매사 짜증을 표출하는 것도 그녀 나름의 어떤 해소 방법이려니 싶었긴 하지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회사의 구성원으로서의 나와 개인으로서의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일치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면접을 앞두고 각 회사들이 홈페이지에 내건 ‘기업 가치’들을 달달 외우며, 때로는 나와 기업의 이상이 같기 때문에 라는 말로 지원동기를 어필하며 사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아주 보통의 사람이다. 또한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로 잘나지도 못하다. 덕분에 ‘서면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들도 묵묵하게 일하는 이곳에서 어떤 결정권도 없는 내가 과연 공공의 이익과 정의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자기변명으로 줄곧 합리화를 하곤 했다. 비약이지만 따지고 보면 막상 갈등 상황에 처한 고객사의 직원들은 자신이 대기업에 소속돼있다는 것을 이유로 때로 부모의 자랑이 되기도 하고, 은행과 동창들과 연애 시장에서 괜찮은 조건의 사람으로서 분류되곤 하지 않는가. 그들의 회사가 화학물질을 누출시키거나, 탈세를 하거나, 어떤 인증을 조작한 정황이 발견되어 사회적 질타를 받을 때에도 말이다.


나는 사회 안의 개인은 모두 가치의 상충이라는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이런류의 고민 자체가 허무한 일이라고 생각해왔고, R의 발언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뭐, 사실 찔렸다는 말이 맞긴 할 것이다. 이런 문장들 조차 궁색하다고 느끼고 있는 지금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비영리단체에 들어가 외로운 저소득 근로자의 길을 갈 수도, 보리수 나무 아래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잔다르크도 아니지만 불현듯 퇴사 욕구가 일렁일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아직 다 갚지 못한 학자금 대출과, 매월 내야 하는 월세가 눈앞에 아른거린다면 나는 과연 성숙하지 못한 시민인 것일까.



이렇듯 종종 마주하는 불편한 상황들에도 나는 무미건조한 나의 입장을 잘 지켜왔었다. 다만, 3년 차에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당시 나는 한 집단소송을 담당하게 됐다. 그것은 한 공기업에 대한 인근 주민들의 특정 질병 발병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사건이었다. 수임 전 여러 개의 소가 제기되어 있었고, 법인은 공기업 측을 대리하게 되었다. 당시 내 담당 변호사는 그 사건의 주수행 주니어로 배당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건을 모두 관리하게 되었다. 수임 전 의뢰인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분류해 소송기록을 만들어야 했던 나는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누락된 부분은 없는지 살피던 와중, 상대방 목록에서 아는 이름들을 발견했다.


20대 초 해당 질병으로 투병을 했던 친구 덕에, 또한 두 언니와 어머니 모두 해당 질병으로 수술을 받아야 했던 사정으로 내 고향에서 집단소송 설명회를 개최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족들도 위임장을 낼지 말지 고민을 하던 와중이었던 시기다. 하지만, 이 사건을 내가 담당을 하게 될 줄이야. 수십 장이나 되는 상대방 명부와 그들이 제출한 가족관계 증명서에는 고등학교 동창도, 그녀의 친언니와 어머니도, 끝내 존경하지 못했던 수학선생님의 이름도 있었다. 워낙 좁은 지역이고, 학교마저 몇 개 되지 않아 두 세 다리만 건너면 모두 다 아는 사이인 지역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 사건으로 야근을 하고, 원고의 주장을 반박하는 자료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검색을 해야 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러 먹먹하고 갑갑하기도 했다. 가끔 세탁소에서 내 옷을 망쳐놓기라도 하는 날엔 ‘아, 업보인가 보다’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건은 얼마 안가 다른 변호사실로 이관이 되었고, 나는 관련 업무를 담당하지 않게 되었었지만, 당시의 나는 혼자서 참 입장이 많이 난처했다. 물론 회사 일을 외부에서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어떤 규칙들이 있기 때문에, 내쪽에서 먼저 가족들과도 관련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마침 당시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몇 년은 고향을 찾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누군가 알았다면 나는 아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들로 말미암아 나는 직원부터도 이런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곳이 바로 로펌이라는 것을 비로소 실감했다.



후배 S는 약 2년을 다니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녀는 전직에 대한 목표가 있어 불철주야 공부하며, 젊은 세대답게 SNS 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나름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었다. 슬슬 퇴사를 진지하게 고려할 시기, 그녀는 특정 음료를 마시던 중 이물질을 발견하고 SNS를 통해 관련 내용을 게시했다. 해당 업체는 S의 SNS를 샅샅이 뒤져 그녀가 자신들의 법률자문사에 재직 중인 비서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담당 변호사를 동원해 회사 안에서 그녀를 회유하고 또 압박했고, 곧 퇴사 예정이었던 S는 절대 그 게시물을 내리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워낙 쉬쉬하는 것이 일상인 로펌에서 S의 일화는 아직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고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사건 그 자체보다. S의 팀장이 변호사의 지시로 면담을 진행하며 막상 그녀에게 ‘소신껏, 의지대로 행동하라’고 했다는 말이 더 인상에 남았다. 과연 그녀의 그 말이 S에게 진심으로 했던 말일지 아니면 할 테면 해보라는 말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비서 중 최고참급인 그녀는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내 고민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을 찾은 것은 아닐까.




- 그런 일을 하는 변호사는 되지 않을 거예요.


친구의 전 남자 친구 J는 입사 초기 그저 경제원인 내 직장을 아주 찜찜하게 생각하도록 만든 인물 중 하나다. J는 자신의 정치색이나 종교성향을 가감 없이 펼치곤 해서 대하기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그가 녹두거리 인근 로스쿨을 다니던 때였다. 하루는 그가 곱창을 사주었는데, 밥을 먹는 내내 ‘그곳’은 ‘못된 곳’이라고 연설을 해댔다. 또한 자신은 ‘그런 일’은 하지 않는 인권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변시에 합격한 후 언행일치의 행보를 보여주었고 그건 꽤 멋져 보였었다. 


영어공부 하려다 교훈을 얻은 장관님 인터뷰



나는 J의 말에 따르자면 ‘못된 곳’에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돕는 7년 경력의 악어새다. 상위 포식자의 이를 닦아가며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에서는 그래, 떳떳하진 못하다. 그리고 나는 이 문제의 해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때문에 답도 찾지 못한 채 뜬구름 잡듯 주절거릴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을 놓지 않는 것 부터가 해답을 찾아나가는 길에 중요한 일이지 않을까.






설령 이곳이 지탄받아 마땅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로펌이 수행하는 사건들을 ‘그런 일’이라고 싸잡아 취급하기에는 이곳엔 다수의 공익사건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실제로 의식적인 많은 전문가들이 공익활동을 하며 여기저기 봉사도 많이 다니며 직원그룹이 그 활동을 돕고 있기도 하다. 내 담당 전문가만 해도 대기업의 고충 해결해 주기 위해 연일 야근을 하지만 그 와중에 소외계층을 상담해 주기 위해 한 번씩 자리를 비우고 무료로 소송 대리도 소화하고 있다. 또한 법인 내부에는 경악할만한 사건들 수임을 두고 이쪽에서 먼저 거부했다는 훈훈한 소식들도 들려오곤 한다.




꺼내놓지 못하는 숱한 번민과 감정들이 편재하는 로펌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해법을 찾아나가며 회사원으로서 오늘도 또 버텨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마저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비슷한 수준으로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은 또 없을지 생각하며, 먹고사는 것 이상의 고민을 하게 될 날을 그려본다. 그땐 ‘동년배에 대한 어떤 부채의식이 있다’는 한 유명인사와 같은 마음은 아니길 바라며  오늘도 또 출근 준비를 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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