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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서 C Oct 21. 2019

비서의 괴로움은 당연한가요?

층돌이만 괴로웠을까



<출처 - 법률신문>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후, 법률신문에는 ‘로펌 밥총무 없앤다' 등의 기사가 1면에 났다. 그날은 오후에 배달되는 신문을 담당 변호사에게 전달한 많은 비서들이 코웃음을 쳤던 날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로펌의 점심시간엔 특이한 광경이 펼쳐지곤 했다. 매일 11:45경, 각 팀의 저 연차 변호사가 온 집무실을 돌며, 식사 가시죠를 외쳤다. 그의 인사로 점심식사 참석을 희망한 많은 전문가들이 책상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앞으로 모였다. 우리는 보통 그 막내 변호사를 ‘층돌이’라 불렀다.




10:00 - 식당 및 메뉴 공지

11:30 - 참석인원 파악 및 식당에 메뉴 주문

11:40 - 변동사항 조정 및 층돌이에 명단 전달

11:45 - 층돌이의 출발 인사 및 식사 출발




변호사들은 팀을 단위로 매일 점심식사를 가곤 했다. 물론 시간이 허락하는 사람들에 한해서다. 밥총무라고도 불리던 층돌이들이 예약 및 비용을 관리했고, 점심시간만큼은 비서인 듯 선배들을 대우하고 챙겨가며 식사를 다니곤 했다. 그리고 관련 업무에 대한 매뉴얼이 A4용지 몇 장은 될 정도로, 각종 연락처와 메뉴와 해당 식당 예약 시 주의할 점들로 가득한 엑셀 시트만 열개는 족히 넘을 정도로, 층돌이가 식사 출발을 외치기 전까지 당번인 비서들은 꽤 많은 일을 해두곤 했다.



변호사들의 점심, 어떻게 준비할까?


당번 비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층돌이에게 월간 식단을 구성해 확인받았다. 인근 상권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초안 작성 전 점포가 아직 영업 중인지 및 그들이 제공하는 메뉴 변동은 없었는지에 대한 파악이 우선되어야 했다. 층돌이는 점심식사 현장에서 보고 듣는 식당에 대한 선배들의 평 및 팀 내 각종 행사들을 고려해 비서에게 넘겨받은 예약 리스트를 조정한다. 그가 관리하고 있는 점심 펀드의 잔액도 고려 대상이다. 그렇게 층돌이에게 확정된 월간 식단을 받은 비서는 주간 단위로 미리 식당 예약을 해둔다. 이때, 근 몇 년에서 몇 개월 사이 축적된 데이터로, 팀 변호사들이 해당 식당 이용 시 얼마나 참석을 했었는지를 파악해 대략적인 예약인원을 정했으며, 당일 또 다른 단체가 있어 서빙이 늦을 수 있다던지 하는 점포의 상황도 미리 파악해야 했다. 식사 도중 불편상황이 발생하면, 층돌이와 당번 비서들은 전문가의 컴플레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참 거창한 준비과정을 통해 비서들은 매일 아침 예약해둔 식당을 공지하고, 참석자와 참석자가 먹을 메뉴를 미리 조사해 식당에 주문을 해두었다. 보통 개인별 메뉴와 나누어 먹을 공동의 메뉴도 인원수에 맞게 주문해둔다. 출발 전까지 잦은 인원수 및 메뉴 변경으로 실시간 예약을 조정해두는 비서는 11:40경 층돌이에게 참석자와 그들이 주문한 메뉴 목록을 정리하여 전달하며, 오전 내내 식당과 층돌이와 참석 전문가들의 연락에 대응하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수북한 메일들을 바라보며 낮은 한숨을 내쉰다.


층돌이는 참석자 명단을 받아 당일 참석하는 선배들의 방 문 앞에서 인사를 돈다. 그와 중에 시니어의 방에서 함께 회의 중이던 한 선배가 충혈된 눈으로 오늘 메뉴는 뭔지 물어본다. 그는 오늘 참석자 명단에 없는 사람이다. 오늘은 다행히도 참석인원이 ‘홀수’라 식당에 자리가 모자라지 않을 것 같다. 층돌이는 얼른 선배의 메뉴를 확인해 당번 비서에게 주문을 추가해달라고 한다. 층돌이는 인사를 돌고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서도 선배들의 메뉴 변경 여부나 급작스러운 의뢰인 요청으로 참석을 취소하는 사람이 있는지 등을 확인하고 사무실을 떠난다. 그렇게 전문가들은 예약해둔 식당에 도착해 미리 주문해둔 음식을 바로 받아 식사를 한 후 사무실에 복귀하곤 했다. 그리고 그날 식사 도중, 시니어의 컴플레인이 있었다면 당번 비서에게 사실을 전하고, 다음 예약 시에는 동일한 불편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당부의 말을 전해두는 것으로 하루의 점심 업무는 마무리되었다.





이게 왜 괴롭힘인데?



누군가는 이것이 법원 특유의 문화라고 했다. 아직도 부장님이라 불리는 많은 분들이 로펌으로 그들의 문화를 옮겨 온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진위여부는 관심도 없을 정도로 그 문화를 아주 싫어했다. 블루길도 아니고 그 외래의 문화는 충분히 이곳을 교란시켰다. 한 일 년을 줄곧 층돌이의 비서로 전문가들의 끼니를 챙겨 온 나는, 이후 당번제가 되어 또 몇 년간 열 달에 한 번은 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아주 고통받았다. 당번일 때는 퇴사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며, 한때는 회사에서 밥을 먹으면 거북해 자주 속을 게워내곤 했다. 아직도 가끔은 점심에 ‘점’ 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 그리고 법인 차원에서 이 뭣도 아닌 제도를 없애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적잖이 시달렸었다.


  우리가 시달렸던 첫 번째 이유는 도가 지나친 전문가들의 요청사항이었다. 적어도 우리 팀 전문가들은 식당 도착 전, 모든 메뉴 주문이 끝나 있길 바랐다. 식당에서 무엇을 먹을 것인지 정하고,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나. 일면 이해는 한다. 그것은 비단 그들이 시간을 쪼개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시니어와 밥 먹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주니어 변호사들에겐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의 시간이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을 수 있다. 실제로 회사 앞 중국집에서 다른 팀 전문가들을 목격한 적이 있다. 옆 테이블에서 너무나도 분주하게 컵에 물을 따르고 냅킨을 나눠주고 아직 안 나온 선배의 메뉴를 채근하는 등의 온갖 막내의 본문을 다하고 있던 한 주니어를 보고 애잔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나도 힘들었다. 작게는 20명에서 큰 팀은 층별로 나누어 운영하기도 한다는 식사는 매일 그 참석자와 메뉴를 정리하고 예약하는 것만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공유 문서를 이용하여 참석자들이 직접 메뉴를 입력하게 하는 선진/민주화(?)된 팀도 있었지만, 내가 담당한 팀은 그 수준을 바라기 힘든 전형적인 '대우'를 바라는 보수적인 팀이었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요청으로 관련 내용에 대한 매뉴얼은 그 분량을 점점 더해갔다. ‘**식당은 짜게 조리하지 않도록 요청’, ‘공동 메뉴는 미리 개별 그릇에 담아 서빙하도록 요청’, ‘****예약 시 신발 벗지 않는 자리로 요청’류의 디테일이 그중 과반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 까다로운 요청들에 모순되게도 그들은 참석여부 회신을 가장 '하찮은 일'로 여겼다. 제시간에 맞춰 인원이 확정되는 것이 감사할 일이었다. 칸트의 현생인가 싶은 인물 몇몇만이 감사하게도 칼 같은 회신을 해줬을 뿐이다(보통 그런 분들은 메뉴를 번복하거나 급작스러운 취소를 하지도 않는다.). 이렇듯 늦은 회신은 예삿일이었고, 심지어 출발 직전 참석을 취소해달라는 지시도 곧잘 받았다. 가장 까다로운 요청을 하는 전문가들의 취소율이 가장 높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메뉴 주문까지 마친 상황에서 비서에게 지시만 내리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비매너 전문가들에게 나는 이골이 났었다. 식당에서 이미 조리가 끝난 상황이라며 취소를 해주지 않아 참석 인원수보다 주문된 음식의 수가 더 많았던 날들도 있으니 말이다.


내가 힘들었던 두 번째 이유는, 이 당혹스러운 문화에 많은 내상을 입은 주변 상권의 원성 탓이었다. 그들은 정말 까칠했다. 때문에 나는 거의 1년간 매일 의뢰인도 아닌 이들에게 사정하고 사과하고, 때로는 아양도 떨며 그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제발 미리 주문 좀 넣어달라고 매달렸다. 출발 직전 다른 걸 먹으러 가겠다며 모든 예약을 취소해달라고 하는 날이면, 그날 사장님들의 한숨과 짜증은 모두 내 차지였다. 얼마나 심했으면, 한 번은 또 그럴 줄 알았다는 대답을 들은 적도 있다. ‘취소? 또? ***이지?’ 라며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식당 직원 분들의 대화에는 한숨과 짜증과 비아냥이 가득했다. 노쇼나 다름없는 상황에 나부터가 염치가 없어지는 순간들이었지만, 내 밥도 아닌데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함은 더해졌다. 한 열 개의 식당을 동시에 예약해두고 한 곳에서만 식사를 한다는 모 기업 회장 이야기가 자주 생각났다. 그는 노쇼를 해도 욕을 먹지 않은 손님으로 유명했다. 자신이 예약하고도 가지 않은 나머지 식당들에 식대 100%를 모두 지불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회장님 급도 아니지만, 돈도 잘 버는 사람들이 회사 뒤편 칠팔천 원 하는 식당들에 무상으로 노쇼를 할 때면, 나는 당장 그들에 대한 화보다는 식당에 전화해서 또 짜증을 받아내야 하는 그 상황이 두려워 가슴을 졸여야 했다. 그리고 인기 많은 식당이니 금방 다른 손님이 올 것이고, 딱히 식당에서 손해는 안 볼 거야 라는 비양심적인 합리화를 해가며, 때로는 심한 사장님의 짜증에 짜증으로 응수하며 얼굴에 철판을 몇 겹은 쌓았었다. 그렇게 나는 이 업무를 하며 내가 아주 싫어하던 류의 못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이 업무 탓에, 휴가라도 가려고 하면,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 하나 난감했다. 홀로 한 일 년을 해오다 하루는 내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토로하자, 그때서야 이를 참작해준 당시 팀장은 이 업무를 당번제로 바꿔줬는데, ‘나눠 갖는 고통’이 되어버린 그 이상한 업무 때문에 나는 팀에서 역적이 된 기분으로 또 일 년을 살았다. 언제 한 번은 당번이었던 휴가 가는 선배로부터 휴가 중 업무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대화 도중 ‘이 새끼야’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물론 그 분노는 이해하나, 내가 왜 회사 밖에서는 아는 척도 안 할 인간에게 우리 아빠도 아닌 다른 놈인지 뭔지도 모르는 놈의 새끼로 불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점심식사 참석은 그 선배의 담당 변호사가 제일 많이 했고, 번복이나 까다로운 요청도 그가 제일 많이 했었다. 정작 내 담당이었던 층돌이는 매일 출발 인사만 돌고 책상 앞에 돌아와 빵 쪼가리로 식사를 하며 서면을 쓰곤 했다. 본의 아니게 눈치꾸러기가 되어버린 당시의 나는 내심 팀원들이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렇게 혼자 애쓸 때 내일 아니다 라고 외면했던 값이다’라고 통쾌해하기도 했다.





층돌이 변호사, 당번 비서, 회사 근방 식당의 점주들까지 모두 이 이상한 제도로 짜증이 났다. 누군가는 내가 이러려고 변호사가 되었나 자괴감이 들었다 했고, 또 누군가는 앞으로는 그 회사는 예약 안 받겠다라고도 했다. 그런데 내가 정작 짜증이 났던 또 다른 이유는 이따금씩 ‘나는 짜증조차 내서는 안될 존재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검찰에서 몇 해 전 이 문제로 몇 번의 보도가 나갔던 것처럼, 로펌에서도 이 쓸데없이 번거로운 문화 탓에 많은 말들이 오갔다. 블라인드라는 익명의 커뮤니티에서는 관련 내용으로 몇 번은 극렬한 논쟁이 있었다. 내용은 간단하게 이러했다. 익명의 비서가 층점 업무로 너무 힘들어요라고 하자, 그건 너희 일인데, 회사 다니면서 어떻게 편한 것만 바라냐. 분수를 알아라라는 등의 댓글들이 달렸다. 오프라인에서도 모든 팀이 다 그런 몰지각한 비매너의 전문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매니징을 못한 비서 탓이다 등등. 이 업무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직분을 모르는 비서 태도의 문제이며 동시에 우리의 능력 부족 탓이라고 비난하는 반응들이 또 존재했다. 나는 극단적인 반응들을 마주하며 마치 온라인에 팽배한 '여혐'이 그 익명의 커뮤니티와 로펌에서 비서를 대상으로 투영되기라도 한 듯한 인상을 받았고, 하마터면 내 그간의 고통들이 내가 분수를 몰라 느낀 고통이며, 내가 알아서 잘 해소만 하면 되는, 어떤 제도상의 문제는 전혀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착각할 뻔하기도 했다.




서비스직을 택했으니,

직장 스트레스는 당위적인 것일까?



괴롭힘 방지법 시행 후, 윗선에서는 법인 차원에서 점심식사 문화를 폐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리고 당장 폐지하는 것을 무리로 본 우리 팀에서는 한 한 달은 더 층돌이와 당번 비서가 수고를 했다. 이 업무와 관련한 스트레스로 퇴사까지 생각했던 나는, 마지막 당번 비서로서 그 업무를 마무리하며 감회가 남달랐다.


나는 물론 회사가 '직원'들의 고충까지 헤아려 그 업무를 없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변호사’들이 괴롭힘이라고 생각한 '층돌이'를 없애다 보니, 층돌이를 돕는 '비서'들이 엉겁결에 수혜를 입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층돌이까지 비서가 했다면, 아마 이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겪어온 이곳은 그런 곳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변호사씩이나 된 내가 이렇게 점심에 밥 총무나 하고 있다니’는 물론 그들 입장에서 기분 나쁘고 허탈한 일이었을 수는 있다. 그 라이선스를 얻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고생했을 것인가. 그렇다면, 비서들은 비서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일과 그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했던 것일까? 사회생활을 할 정도로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성숙한 한 개인이, 내가 먹을 밥도 아니고 타인이 먹을 밥을 위해 매번 욕받이 짜증 받이가 되어야 했던 것은 정상인 일일까. 나는 당장 대표님이 물어온다 해도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내 식당을 만들어주지 않아서, 고통이 되는 업무가 하나 더 늘었으니, 이것은 회사의 책임 아닙니까라고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물론, 각종 예약 업무는 우리의 업무가 맞다. 하지만 문제는 그 업무의 내용이 예약을 넘어 ‘변호사들의 변덕과 비위(소금 간? 입식/좌식?)를 맞추느라 주변 상점의 원성을 사며 그들의 액받이가 되는 것’도 포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회사에서 ‘업무 외 시간’으로 분류하는 개인의 점심식사에 대한 일로 ‘업무 비서’가 자신의 업무를 저버린 채 오전의 대부분을 할애하면서까지 처리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 식사가 의뢰인을 만나는 자리라거나, 어떤 사건 관련한 내부 회의로 식사를 함께 진행하는 것들이라면 나를 비롯한 많은 비서들이 기꺼이 준비할 것이다. 실제로 점심에 회의를 하는 경우나 세미나, 혹은 의뢰인 초청 강의라도 열릴 때 우리는 도시락을 주문한다. 이런 경우는 어떤 불평 없이, 내방객이 채식주의자인 경우 그 채식 수준까지 조사하여 열심히 준비한다. 하지만 우리는 의뢰인을 만나 회의도, 영업도 하는 시간도 아닌 단순한 점심까지 수십 개의 디테일을 가지고 매번 예약을 하며, 때로는 취소하며 갖가지 원성을 들어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다.




요청사항이 가득한 예약전화에 대한 식당 점주분들이 ‘점심엔 예약 안 받는데? 선주문이요? 그냥 와서 시켜요’라고 반응을 보이면 ‘아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래도~’라고 종종 너스레를 떨며 이것을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비단 비서들 뿐만은 아니니 그나마 위로를 받았다고 하면 우스울까. 우리에게 이것이 괴롭힘이라면,  각 식당에겐 근본 없는 갑질이었을 것이다. 이미지는 의뢰인한테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기본적인 예의와 인성 수준을 챙길 수 없을 만큼 바쁘다면 그냥 도시락을 시켜서 방에서 먹으며 일을 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 같은데, 그렇게 바쁘다는 시간에 변덕만 한 한 시간은 부린 것 같은 상황을 나는 자주 마주했다. 그리고 층돌이는 아니지만 자주 자괴감에 휩싸였다. 때로는 누군가의 고기 굽기를 미디엄 레어와 미디엄 사이로 조절하기 위해 피크타임에 전화를 잘 받지 않는 식당에 수십 번은 다이얼을 눌러가며 내 고유의 업무들이 모두 뒷전으로 밀려야 하는 것이 아주 불합리한 상황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당번 비서를 한다고 해서 다른 업무를 덜어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전 내내 몇 번이나 거듭해서 메뉴를 바꿔달라고 하거나, 취소와 참석을 번복하는 이들로, 또 확실한 숫자와 메뉴를 알려달라는 식당들의 고압적인 태도로 오전에 미룬 업무들을 처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야근을 하게 되는 상황이 지긋지긋하고 짜증이 났다. 이것이 과연 내가 비서라는 직업을 택했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스트레스일까?






마땅한 권리를 감사해야하는 사람들


서비스직에게 이런 류의 스트레스나 괴롭힘이 마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감정노동자를 보호하자는 산업안전보건법의 존재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직장인이라면 부당한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또 알 수 있다. 회사는 우리를 '비서'라고 부르며 업무 시 감정을 통제하고 법인 안팎으로 상냥함과 친절을 기대하지만, 막상 의뢰인으로부터 욕설이나 상식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회사 내부에서 생기는 갖가지 스트레스에 대한 책임 역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나는 작년도 인사평가  전문가 점심식사 지원 업무가 비서의 ‘직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실소 금치 못했었다. 인사팀에서 제대로  인사를 해보겠다며 비서팀 직무분석에 힘을 쓰고 외주로 컨설팅까지 받았었다던데 결과적으로는 비서의 직무에 논란의 화두인 전문가 점심식사 예약 업무를 기재해두었으니 말이다. 리고 그것은 아주 조악한 수준의 분석이었는지, 우리가  빈번하게 하고 있는 다른 업무들은 목록에 있지도 않았다. 때문에 나는 그저 의견이 분분한  업무를 우리의 업무라고  박고 싶어서 기재한 것인지 인사팀의 의도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내가 주제를 모르고 까불었던 것인가.  업무가 맞으니 닥치고 해야겠네 라고 생각이 다시 슬금슬금 올라오기도 했다. 그야말로 내가 나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결국은 법률신문에서 ‘괴롭힘’으로 분류한 것들을 비서의 직무라고 인사평가 표에 기재해두었던 그들이 과연 기사를 접하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묻고 싶다. 지루하지 않도록 다채롭게 구성해 준 날짜별 식단과 시시각각 바뀌는 주변 상권과, 그 식당의 메뉴들을 확인해주고, 당일 참석인원과 메뉴를 모두 취합하여 예약 조정을 해둔 후 넘겨준 명단으로 사무실 한 층을 돌면서 출발하자는 말을 하는 것도, 선배들과 식사를 하는 것도 누군가에겐 괴롭힘이었다는데(물론 그 식사 시간들이 괴로울 것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와 관련한 비서들의 고충은 마땅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가끔 회사에서는 비서를 일반적인 직원의 범주가 아니라 모든 번거롭고 불편한 상황에 맞서야 하는 어떤 제3의 존재로 분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몰지각한 일부 직원들은 비서를 왜 4년제를 뽑아서 대우받기만 바라게 했느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리를 내부와 외부의 당연한 총알받이로 만들면서 고충을 외면한 그들이 진정 인사를 하고 있던 것은 맞을까. 인사팀은 그동안 회사가 직원들을 괴롭히는 제도를 가지고 운용해왔었다는 흔적을 돈을 주고 컨설팅을 받아 남긴 것이나 다름없다.



신문지상에서, 또는 뉴스에서 직장 내 괴롭힘의 예를 보고, 이런 일들도 괴롭힘이구나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앞서 로펌 내에서 직급과 직책으로 말미암아 정당화되고, 자행되어 왔던 많은 행위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나도 한 때 그것에 불편함을 느껴도 그것은 내가 이 직업을 택했기 때문에 견뎌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이것은 많은 서비스직 종사자 분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 일 것이다. 그래도 법인이 법률회사라는 이유로 최근 괴롭힘 금지법에 관한 설명회도 열고, 묵묵하게 감내해 왔던 괴롭힘 요인(?)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해 물론 감사한다. 그러나 동시에 어떻게 보면 자충수일 수도 있겠다 싶어 더러 불안하다. 결국 누군가의 번거로움과 귀찮음을 해결해주는 일을 하기 위한 직군이 또 비서이니 말이다. 법을 근거로 하여 불편한 상황들을 하나 둘 없애다 다른 불편함을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타인의 불편을 덜어주는 일’이 ‘불필요한 괴로움을 감내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혼동하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인사팀조차 비서의 업무에 대해 인식이 부족하고, 비서들끼리도 어떤 것까지가 비서의 업무인지 의견이 분분한 상황에서 앞으로 우리의 업무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두렵기도 하다. 윗선에서 타 로펌을 표방한다고 업무 시스템을 바꾸고 비서의 업무를 점차 축소시켜 나가는 부분들이 있어 ‘시녀’의 정체성만 남기려는 것인지 하는 냉소를 했던 근 몇 년간이었기 때문에 그 앞으로가 더 예측되지 않아 걱정된다. 하지만 동시에 회사를 떠날 용기가 없다는 것이, 회사의 방침이 어떻게 변하든 마땅하지 않은 괴로움들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한다. 점심식사 예약에서부터 본인 막돼먹음을 숨기지 못했던 전문가들의 철저한 하급자로서의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언제나 그렇듯 전쟁 같았고, ‘처벌 규정이 없어 애매’하다는, 말 많은 이 법 하나 시행되었다고 앞으로가 꽃길이길 기대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저 나처럼 철저히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누리는 것이 마땅한 권리가 과연 내 것이 맞는지 아닌지의 문제로 쫄지 않는 날이 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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