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롭지 못한 추억
어느덧 올해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시즌 메뉴처럼 직원들은 마주쳤다 하면 송년회를 화젯거리로 삼는다. 어떤 팀은 11월 초부터 송년회 준비단이 꾸려졌다고도 한다. 로펌의 송년회도 일반 기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문가 직원 할 것 없이 회사 안 자신이 소속된 그룹이나 업무를 기준으로 공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여러 번 송년회 자리를 갖는다.
송년회는 한 해간 수고를 위로하고 신년 의지를 다지는 뜻깊은 자리이지만, 이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행사인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는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많은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기인한다.
로펌은 회식이 일반기업에 비해 많지 않다. 비서는 더더욱 그렇다. 송년회 같은 연례행사가 아니고서야 회사 사람들과 술자리를 갖는 일이 거의 없는 비서들도 많다. 그리고 비서들끼리도 여초 집단의 특성으로 점심 회식이 보통이며, 간혹 있는 업무시간 이후 회식은 가벼운 반주를 곁들인 식사로 마무리되곤 한다.
그룹마다 다르지만 로펌의 비서가 참석하는 공식적인 송년회는 보통 두 번 정도이다. 각 비서팀이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비서들의 송년회가 그 첫 번째이고, 둘째는 특정 그룹(혹은 팀)의 전문가/직원이 함께하는 그룹 단위의 송년회다. 대부분 호텔이나 식당의 전용공간을 대관해 식사를 하고, 미리 예약된 2차 장소로 이동해 가벼운 술자리를 갖고 파하게 된다. 워낙 한두 달 전부터 연말 일정이 꽉 차있을 정도로 바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일정 맞추는 것부터 골치지만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하면 송년회 준비위원회까지 꾸려 프로그램을 짜가며 야무지게 행사를 준비한다. 반면 어떤 그룹은 아주 깔끔하게 ‘기부’나 ‘공연 관람’으로 연말을 마무리하기도 한다. 이런 ‘대안적 송년회’를 실천하는 팀들은 법인 내에서도 좋은 평을 받고 더러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보통 모두가 쉬쉬하고 있는 연말의 사건사고는 구태에 머물러 있는 팀들에서 관찰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은 ‘기쁨조’가 아니다. 그런데 종종 그렇게 생각하는 상급자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문제의식이 없다. 비서의 적은 과연 비서인가. 언젠가 비서의 있지도 않은 품위를 지키라는 회사의 공지를 보면서, 나는 아직은 사원이었던 그 해 연말을 떠올렸다. 팀장도 뭣도 아니던 선배 E는 한참은 어린 비서들에게 송년회 장기자랑 명목으로 알지도 못하는 아이돌 노래에 맞춰 춤을 추라고 했다.
당시 나는 꽤나 혼란스러웠다. 어떤 순간에는 비서의 권리에 대해 누구보다 강한 주장을 하는 선배들이 비서를 가장 하찮게 만들려는 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토요 예능프로도 아니고 댄스 신고식이라니. 허접한 실력도 실력이지만, 업무로 마주해야 하는 담당 전문가를 앞에 두고 결코 그런 망측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기가 찬 요구에 난감한 마음도 잠시, 이 소식을 전해 들었던 사수 H는 본인도 한때 동기들과 춤 선생을 구해 회의실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했었다고 했다. 본인들의 주제곡은 ‘허니’였다고…. 무릇 살면서 듣는 ‘우리 때는’이 붙는 말들은 결코 어떠한 위로도 될 수 없다 생각했던 나지만, 당시에 이 쪽팔림이 내 몫만은 아니라는 것이 조금은 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전 직장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곳에선 창립기념행사를 이유로 프로야구단 치어리더까지 섭외 해 안무를 배웠었다. 하지만 그것은 본사 직원 대다수가 남녀와 직급을 떠나 차출되었던 마스게임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첫 송년회에서 내가 처했던 문제는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것은 ‘인원수’나, 직급과 성별과 관련한 어떤 ‘형평’의 문제보다는, 직원 하나가 쉽게 누군가에게 우스운 상대가 되기 쉬운 이런 류의 강압이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유독 비서들에게는 더 악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더 달갑지 않았다.
이곳으로 이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전 회사 사장으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그는 내정자가 있었다는 채용에서 자신의 아들보다 어린 나를 비서로 뽑았고, 6개월의 회사생활 동안, 한 삼 개월은 지속적인 성추행을 일삼았다.
그가 처음 결재를 받으러 들어간 내게 예쁘다며 엉덩이를 때렸던 때를 기억한다. 그해 가을, 창립기념일에 전 직원이 했던 공연에서, 사장의 비서이기 때문에 내가 맨 앞줄에 서야 했던 ‘그 날’이 있고부터였다. 사장은 당시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내게 ‘***가 몰랐던 재주가 있다’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사장이 내 팔뚝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으며 향기가 좋다거나, 사장실에 딸린 탕비실에 따라 들어와 음료를 준비하는 몸을 더듬고 가는 보다 과감한 행동을 시작할 무렵, 나는 이를 악물고 점심시간에 이력서를 고쳐가며, 이곳의 입사 일자를 받았다.
해외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비서의 퇴사 소식을 들었던 사장은 그해 연말, 기사를 먼저 퇴근시키고 내게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 와중에도 맛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생선 매운탕 같은 것을 먹고, 커피를 먹고, 차로 경기도 어딘가를 빙빙 돌던 사장은 차를 세우고 내게 필요한 것이 경제적 지원이면 본인이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곤 나처럼 상황은 어렵지만 욕심이 앞서는 애들이 술집에 나가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사장은 유독 회식이 잦아진 연말, 종종 밤에 전화를 해 내가 자취를 하는 동네로 찾아오겠다거나 회식 후 이미 귀가한 나에게 한잔 더 하자는 등 숱하게 노골적인 의사표시를 해왔었다. 그러나 그 날 그 발언은 그가 저지른 앞선 어떤 행위들보다 내게 큰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순간, 그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주먹을 한대 먹일까 고민도 했지만, 결국 이런 일은 여자가 손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이제껏 해왔듯 모르쇠로 웃으며 차에서 내렸을 뿐이었다.
아직도 가끔은 어디 허접한 드라마에서나 보던 멘트를 내뱉던 그 얼굴이 생각나 울화통이 터지기도, 또 ‘그 나이면 가끔 여우짓도 해야 된다’라는 말을 듣고 살 정도로 요령 없는 내 어떤 부분이 술집에 나설 싹으로 보였을까라는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회사에서 마주하는 사람들끼리는 절대 ‘업무적인 얼굴’만 보여주는 것이 모두에게 안전하다는 생각이다. ‘사적인 얼굴’을 더 알아갈수록,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어떤 호의와 친분이 쌓일수록, 회사 사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불편함은 곱절은 더 커지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연말은 그 분위기와 빠지지 않는 술자리와 굳이 이성을 챙기고 싶지 않은 일부 사람들로 인한 온갖 비상식이 난무하는 시즌이니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작 그런 해프닝으로 의미 있는 행사의 취지를 흐리지 말라는 비판을 들을 수도, 모두를 잠정적 범죄자로 몰아가지 말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본인 의사에 반하여 회사 사람에게 버젓이 엉덩이가 만져진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감히 ‘네가 뭘 알아’라는 말을 해주고야 말겠다. ‘절대’라는 말보다 성급한 단어가 세상에 또 있을까. 그 누구도 타인을 단정 짓거나 타인에 확신할 수 없다.
사람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천박한 사장은 직원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만한 인품은 또 없다는 평을 듣던 그는 비서에게만 다른 얼굴을 보여줬던 것 같다. 이곳에 입사한 이후에도 사장에게 몇 번은 만나자는 연락이 왔었다. 분기탱천했던 나는 전임 비서이자 먼저 퇴사를 한 선배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아, 그렇지.. 사장님 차 속에서 내 손을 슬며시 잡았었지’라는 선배의 말을 듣고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노스웨스턴을 졸업했다는 잘난 그의 아들은, 화장을 곱게 하고 친구들을 데리고 와 이곳이 남편 회사다 하고 자랑을 하던 그의 아내는, 그가 비서를 상대로 스폰 제의나 하는 저급한 인간인 것을 알고 있을까. 당시 겨우 열 명뿐이었던 여직원들은 사장이 비서만 편애한다며 대놓고 나를 따돌렸는데, 그 편애의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것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을까. 인생에도 오점으로 남을 그 끔찍한 육 개월을 내 경력으로 치지 않은지 오래지만, 퇴사 인사를 하던 내게 ‘신났네’라며 비아냥거리던 그 얼굴이,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고민 끝에 큰 목소리 한번 내지 않고 조용히 퇴사한 것에 후회는 없지만, 최근 매스컴에 ‘비서 추행’, ‘비서 성희롱’과 같은 이슈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가 한 번씩 마음 졸이길 바랄 뿐이다.
비단 비서뿐 아니라,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직장인들이 성추행과 성희롱 피해자로서 오늘도 역시 고통스러운 일상을 버텨내고 있다.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어쩐지 이 일로 인한 모든 불이익이 내 차지가 될 것만 같은 생각에 그것을 참아내고 있을 사람들이, 또 그 점을 이용하여 가책보다 오히려 스릴을 느끼고 있을 가해자가 직종을 불문하고 곳곳에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직 후에 더욱 깨닫게 되었다.
- 전문가/직원은 남녀 1:1로 식사하지 않기
- 9시 이후 회식 종료 및 여직원 귀가
- 카톡 금지, ‘업무적 연락’을 ‘문자’를 통하여할 것
이곳으로 이직을 결심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법률 회사에서 적어도 법에 저촉되는 일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펌의 비서는 확실히 타 직종의 비서에 비해 ‘보스’에 대한 리스크가 적은 편이다. 우선 개인비서가 아닐뿐더러, 이런저런 내부의 규율들이 비서를 보호해주고 있기도 하다. 신입사원 교육을 담당했던 팀장 S 역시 로펌의 비서는 유사시 회사의 보호를 받을 장치가 여럿 마련되어있다는 점을 법인의 장점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비서들은 꼭 성추행 문제가 아니더라도 담당 전문가와 문제가 있을 때 자의로 또 타의로 지원팀으로 가게 된다. 지원팀에서 휴가를 가는 비서들의 업무를 대신해주는 역할로 한동안 대기하다 TO가 생기는 곳에 배치되어 새로운 팀에서 새로운 전문가와 일 할 수 있다. 편리하고 감사할 제도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보호 수단들이 특정할 수 없는 선례들을 거름 삼아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곳에서 몇 년을 일하며 느낀 것은 전문가들의 잘남에는 한계가 없고, 보통 잘난 체를 하는 사람들은 그중에서 ‘못난 사람’ 축에 든다는 것이다. 나는 회사에 투입한 내 시간과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회사’에서 받는다. 전문가들이 회사의 수익을 내는 직군이기는 해도, 개인사무소도 아니고 사비로 내 월급을 챙겨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직원들에게 보너스 한푼 따로 챙겨줄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그들 그 정도의 잘남은 내게 효용이 없다. 전문가에게 더 잘하고 못하고는 그들 매너로 결정될 뿐이다.
비서는 겨우 두 명뿐이 없었던 연말의 소규모 회식이었다. 본인 아니면 못 사 먹는 줄 알았는지 으스대며 한우를 사준다던 그 전문가는 이기지도 못할 소주를 댓 병이나 먹고, 옮겨간 자리에서 또 양주를 몇 잔이나 먹고선 인사불성이 되어 옆에 앉은 내 오른쪽 팔뚝을 떡처럼 주물러대며 꼬부라진 혀로 본인의 잘남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다.
그날로 결국,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어쩐지 내게 연말은 곧 성추행의 역사가 되어버렸다. 이런 류의 일이 이골이 났던 난, 술에 떡이 된 그가 팔뚝을 주무를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떨궈냈지만, 허공을 휘젓던 그 손보다 신경이 쓰였던 것은 그 상황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맞은편 네 명의 남성 전문가의 시선이었다. 아무도 그를 나서서 저지하지도, 내 기분 같은 것을 살피는 시늉마저도 없었다. 그들의 방관적 태도는 그해 겨울 또 내게 숙제를 안겨주었다. 그 회식 다음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마주 보던 그와, 그 이후로 자정에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던 것을 보며 나는 이곳도 다를 바 없단 생각에 한 몇 주는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다. 또 일 년도 못 채우고 직장을 그만두고, 나이는 있는 대로 먹고 있는데, 대학원으로 도망을 가야 하는 것인지, 낙향을 해야 하는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진로에 대한 고민을 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얼마 후, 담당 전문가가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 불편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자리에서 비슷한 일은 더 있었다. 어느 때는 당사자로, 또 어떤 때는 목격자로서 불편한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몇 남지 않았을 정도로 빨리 회사를 그만둔 친구가 하나 있다. 나는 어느 날 저녁, 그녀와 그녀의 담당 전문가와 함께 회식을 갔다. 그는 저녁을 먹고 단골이라는 술집에 우리를 데려갔다. 어쩐지 조용한 그 술집에서 친구만 분주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한껏 올라왔던 술기운이 좀 가라앉았을 때, 나는 그녀가 바쁘게 오갔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마치 내게 있었던 그 일을 눈앞에서 관객처럼 보고 만 것이다. 그 전문가는 술에 취해 친구의 팔을 연신 주무르고 있었고, 그녀는 손을 쳐내다 쳐내다 못해 한 번씩 그를 피해 자리를 비웠던 것이었다. 우리는 결국 인사불성이 된 그를 택시에 태워 보냈다. 멀어지는 택시를 보며, 괜찮냐고 묻는 내게 그녀는 의연하게,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평소에 못되게 구는 전문가도 아니고 취해서 그러려니 하고 봐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후 퇴사했다. 그는 아무 기억이 안 날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끔 그 전문가와 마주칠 때면 그날 저녁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전 직장에서 점심시간마다 이력서를 고치던 나와 점심시간마다 영어공부를 한다며 빈 회의실로 향하던 그녀의 심경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감히 생각해본다.
갓 이 년 차에 나는 진지하게 퇴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영업을 하라고 준 법인카드로 매일 비서를 대동하고 점심을 먹으러 다니던 전문가가 급기야 자정이 넘은 시간에 카톡으로 정체 모를 동영상을 보내기 시작한 시기였다. 나는 다른 문제로 당시 팀장과 면담을 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내놓았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들었던 대답은 위와 같았다. 담당 변호사에게 “우리 애들 잘 노는데, 놀고 싶어 하니까 회식 좀 잡아주세요”라고 말하던 그녀라서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팀의 팀장이라는 사람이 저따위 말이나 내뱉고 있다는 게 참 답답하고 한심스러웠다. 나는 그 이후로 그녀를 싫어하게 되었지만, 실제로 많은 상급자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아주 이상한 규율 같은 것들을 회사의 입장인 것처럼 후배들에게 말하곤 한다. ‘그냥 옷도 네가 입어서 야하면 그 옷은 입으면 안 되는 옷이다.’와 같은 류인데, ‘치마를 짧게 입고 다니니 성추행을 당하지’와 다를 바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지 물어보고 싶다. 이 법인은, 팀장을 어떤 기준도 없이 선정하고, 그들에게 생각 이상으로 큰 권한을 부여한다. 그러나 커지는 권한만큼이나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자각을 못하는 일부 한심스러운 선배들의 태도는, 그들로 인해 불미스러운 상황에 처했던 비서들의 고충이 배가 되었던 것을 누군가 호통이라도 쳐서 깨닫게 해줘야 한다 싶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이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긴 경우, 확성기처럼 소문을 내고 다니거나 번거로운 일에 휩싸이기 싫어 ‘처신 잘해라’따위의 말을 내뱉는 사람의 역할을 주로 하고 있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 귀찮다는 온라인 성희롱 예방 교육을 내 손으로 켜드리며, 나는 담당 전문가에게 “그러게요”라고 말했다. 곧 오년째 함께 일하게 되는 담당 전문가 Y는 이런 교육을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딸이 있는 아버지로서 또 착실하게 모든 교육에 참여한다. 나는 회식 자리에서 옆에 여직원이 앉는 것도 어쩐지 불편해하는 담당 전문가를 보며 우여곡절 끝에 이런 부분만큼은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상사를 만난 것에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저 말을 진심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이곳의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불미스러운 일의 경험자이자 목격자로서, 그리고 그 일을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간 한 명의 피해자로서 나는 회사 안에서의 평범한 상황들에도 곧잘 의심하고 불편해하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회사 생활에 소극적이게 되기도, 사람들의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힘들어하게 된 이유가 되었었다. 만약 지금과 같은 좋은 전문가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사라진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그때의 나처럼 혹은 보다 더 심한 일로 문드러진 속을 어쩌지 못하고 퇴사를 고민하고 있을 수도, 다가오는 회식의 계절을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로펌에서도 나름 노력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여느 회사들처럼 성희롱/성추행 예방 교육을 실시한다. 그 교육은 온라인으로도 또는 초빙된 강사를 통해서 진행된다. 출강한 강사마저도 ‘알아요. 가해자는 막상 여기 없죠? 왜 당하는 입장인 사람들이 앉아있어야 하는지 어이없죠?’라고 할 정도로 비서만 출석률이 높은 교육이기 때문에 대체 어느 정도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유사시 대처를 잘하기 위한 교육이라고 해도 막상 문제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안이 벙벙해지고 배운 대로 대응하기 힘든 상태가 되기 마련이다. 당하는 사람이 미리 조심하는 것보다. 하려는 사람들이 하지 않도록 엄격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 ‘재수 없게 걸리면, 이렇게 피해라’ 정도의 교육으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장 9시 이후 회식 금지부터도 지켜지지 않는 분위기인데, 회식을 피하고, 항상 일찍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직원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애사심이 없다고,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뒷말이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 애석한 일이다. 그리고 직원부터도 직원에게 그런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이 더더욱 애석한 일이다.
하루아침에 고쳐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또 몇 번의 연말을 더 보낼지 모르지만, 한해 한해 더 행복한 연말을 맞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내 지난 몇 해간 연말이 나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렇게 한해 한해 더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낙인을 두려워해 할 말도 하지 못하고 속을 끓여가며 모니터 앞을 지키고 있을 누군가가 있을 것만 같아 마음이 쓰리다. 부디 그들도 나처럼 한해 한 해 더 나아지기를, 또 회사가 도모하는 발전이라는 부분이 단지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지 않기를 또 바라며, 겨울이 깊어지는 밤 또 하루를 마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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