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번 퇴사를 미루며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용기 있는 순간이었다. 월급쟁이 주제에 돈 받고 하는 일에 못하겠다는 말을 하고야 말다니. 정말 하고싶었던 말은 ‘그만 두겠습다.’였지만 말이다.
때는 지난겨울. 인사평가 시즌의 팀장 면담 시간이었다. 나는 면담 일자가 잡힌 후부터 며칠째 곱씹던 '전문가를 변경 해 달라. 불가하다면 다른 팀으로 가겠다.'라는 말을 결국 내뱉었다. 잠시간 정적을 깨고, 팀장 L은 ‘다른 팀에 갈 필요는 없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후련함과 동시에 책임감 없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잠시 느꼈던 것 같다.
짧지 않은 시간 로펌의 비서로 재직하며, 내 이익을 주장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타인의 편익을 위해 복무하는 직군을 택했다는 이유로, 되도록 내 의견을 내는 일을 피해왔던 탓이었다.
나는 보통 남이 내게 굳이 친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십 년이 넘는 경제활동을 통해 얻은 감정의 굳은살 같은 것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나를 아주 무던한 사람으로 때론 체념한 사람으로 만들곤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이제껏 이유 없이 비서에게 윽박지르는 사람도, 물건을 사정없이 던져대며 애먼 화풀이를 하던 사람도, 본인 책상 위의 빵이 없어졌다며 되지도 않는 모함을 하던 사람도 꿋꿋이 견뎌왔으며,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담당 전문가를 바꿔달라는 요청을 한 적 없었다.
그 때문일까. 내 입장을 전하고 난 뒤, 동료들도 담당 전문가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고, 나 역시 조금은 이상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내가 변경을 요청한 전문가는 일이 많다 뿐이지 흔히 말하는 인성이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 오히려 나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신경을 써주는 좋은 상사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모두 내 탓이었다. 이 권태를 이기지 못한 내 탓. 당시의 나는 모든 것이, 하나같이 다 지겨웠다. 내가 처한 상황에 유독 짜증이 나고 과하게 화가 나던 일상의 연속이었다. 매번 똑같이 겪는 부당한 대우도 어쩐지 더 서럽게 느껴져 자정 즈음 몇 번은 울다 지쳐 잠이 들었고, 해가 뜨면 또 무미건조한 얼굴로 출근을 했다. 감정도 얼굴도 푸석하게 맞는 아침, 매일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리고 목소리가, 의뢰인만 달리하며 비슷한 패턴으로 돌아가는 일이, 몇 년째 보고 있는 똑같은 사무실 창밖까지도 나는 모두 권태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다 앞뒤 따지지 않고 퇴사를 하고야 말겠구나 싶었을 때, 에라 모르겠다 라고 던진 한마디는, 역시 나를 구원하지 못했다. 순간의 후련함에 만족해야 했던 그 날 이후, 곧 담당 전문가가 변경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감흥이 크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오히려 할 일만 산더미처럼 만들었던 회사의 강북 이전 덕분에 수습할 수 없었던 권태감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전 직전, 연일 야근을 해야 했던 상황에서도, 나는 강남에서의 마지막 날을 앞두고 한 며칠 이른 출근을 하고, 회사 주변 동네를 배회했다. 자취를 오래 했던 나는 이사를 할 때마다 그 동네를 돌아다니며 추억이 서린 장소를 사진으로 남겨두곤 했는데, 회사가 아니면 절대 발도 들일 일 없을 것 같았던 그 지긋지긋한 동네의 사진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가 조금은 권태의 늪에서 빠져나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연애가 끝나고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 때 한 번씩 이사를 했다는 회사 선배의 말이 이해가 됐다.
추운 새벽 공기를 온몸으로 맞아가며 카메라에 풍경을 담았다. 뷰파인더에 잡힌 것은 국수전골이나 삼겹살에 소주를 사 먹던 보잘것없는 거리었지만 마음이 벅차고도 아렸다. 그렇게 아침 해가 나올 때쯤 나는 회사로 들어갔다. 이삿짐 포장으로 혼란한 사무실 속 그 지겨운 창밖이 아쉬워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곤 정신없이 강남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지났다.
퇴근 전, 정리를 마친 팀원들과 로비에서 사진을 찍었다. 청춘의 과반을, 지난 7년을 보낸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권태와, 지난 내 과오와 분노와 수치만은 제발 그곳에 남아주길 바랐다. 오래간만에 해가 져가는 테헤란로를 보면서, 지척에 두고도 대기가 길어 자주 사 먹지 못했던 커피를 사들고 동료와 마지막 퇴근길을 더없이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주말이면 참새 방앗간처럼 찾았던 광화문 인근으로 출근하고 있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도 하고 있는 일도 똑같지만 권태감은 느낄 새도 없이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 이사 후 한동안 또 야근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아직까지는 한적한 남산을 거쳐 출근하는 기분이 참 좋다. 더이상 정체로 화를 돋우던 신사사거리를 붐비는 버스를 타고 지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 누구 말에 따르면 닭장 같다는 직원들의 공간도 나는 큰 불만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아직까지는.
분명 창밖으로 보이는 북한산이 지겨워질 때가 또 찾아올 것이다. 이사라는 회사의 이보다 큰 이벤트는 경험하기 힘들 것 같으니 그땐 별 감흥도 없는 말을 내뱉거나, 울거나 충동적 행동을 하지 않고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