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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엘 Mar 23. 2024

말레이시아 고아원에서 1년,

한 날은 고아원 아이가 센터에서 수업이 끝나고선 자신의 고아원에 놀러 오라고 초대를 했다. 

“선생님, 오늘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정말?, 가도 될까?”

“네, 선생님이랑 같이 놀고 싶어요.”

“그래, 그럼 저녁 시간에 맞춰서 갈게.”

“이따 봐요~”

“응~ 그래.”

그렇게 아이와 약속을 하고 같이 지내는 언니와 함께 고아원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도착한 고아원. 아이들이 저마다 반기며 달려왔다. 반기는 아이들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들어간 고아원은 열악한 환경이었다. 어린아이부터 고등학생까지 20명이 넘는 아이들과 고아원 원장님 부부까지 한 집에서 다 같이 지내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 한 시간은 저녁 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우리는 저녁 먹을 준비를 해야 했는데 그전에 아이들이 차례대로 씻고 나와야 했다. 


순서는 미취학 아이들이 씻는 시간, 그런데 놀라운 건 아이를 씻기는 건 원장님 부부도 아니고 중고등학생 언니들도 아니었다. 초등학생 아이들이 제일 어린 동생들을 씻기는 것이었다. 그때 그 모습은 나에게 좀 놀랄 광경이었다. 

“얘들아, 오늘은 선생님이 동생들을 씻길게.

너희들은 각자 씻도록 해.”

“네~”


그렇게 나는 초등학생 아이들을 내보내고 어린아이들을 차례대로 씻기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도 부모의 관심과 사랑받을 나이에 어린 동생들을 씻겨야 하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려왔다. 어린아이들을 다 씻길 때쯤 저녁 시간이 되었다. 식사 시간도 문화적 충격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이곳의 문화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식탁과 의자는 있지만 아무도 그곳에 앉아서 식사하지는 않는다. 다 주방 바닥에 앉아 접시 하나에 밥 한 덩어리 카레 소스 그리고 손으로 꾹꾹 눌러서 입안에 넣고 꼭꼭 씹어서 먹는 아이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조용한 식사를 하였다. 

  

나와 언니에게는 손님이라고 수저와 포크를 주는 세심한 아이들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을 자러 가는 시간, 생활하는 곳은 한 집에서 다 해결하지만 잠은 여자아이들만 따로 자는 집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잠만 잔다고 했다. 도착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이 장롱만 덩그러니 있었고 이불도 넉넉지 않았다. 

“선생님, 여기 매트리스에서 주무세요, 이불이랑 베개도 있어요.”

“정말 고마워, 그런데 그럼 넌 어떻게 자려고?”

“괜찮아요, 전 바닥에서도 잘 자요.”

웃으며 아이들은 우리에게 베개와 이불을 건넸고 매트리스를 내어 주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하루를 지냈다. 

 

고아원에서 지내고 돌아온 날, 집에는 비상이 걸렸다. 언니와 내 머리가 가렵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사이 같이 지내는 식구들까지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확인해 보니 아이들에게서 이가 옮았던 것 재빨리 약국에 가서 이 잡는 약을 사서 머리를 감았다. 다행히 약을 쓰니 더는 머리가 가렵지 않았다. 그렇게 집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그러고 어느 날, 한 여자아이가 좀 당황한 듯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애야, 왜 그래?”

“그게…….”

“무슨 일인데?”

“제…. 동…. 동생이 응가를 했어요”

“그래? 근데 그게 왜?”

“실수로 바닥에 응가를 했어요.”

“그랬구나, 선생님이랑 가보자.”

주변은 소란스러웠고 나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치울 도구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급한 대로 삽을 가져다가 아이의 동생이 싼 응가를 치우기도 했다. 다행히 금방 수습이 되었고 아이도 이내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센터 수업이 끝나고 영어학원으로 가서 수업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택시비를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학원에서 집까지 걸어가 볼까?' 

라는 마음이 들어 생각 없이 걷기 시작했는데…. 정말 바보스러운 생각이었다. 

시내를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길 도로에는 걷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왜 이 짧은 거리를 버스나 택시 타고 가지?'

했는데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그때 깨달았다.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시내를 중간쯤 나온 나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정류장도 없었고 그곳을 서는 택시도 없었기에 

뜨거운 햇빛을 그대로 다 받으며 집까지 걸어갔다. 그리고는 쓰러지듯 방에 누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오늘은 원주민이 사는 곳을 방문하는 날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이곳 원주민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여 필요한 물품을 주거나 아이들의 수업을 해준다. 원주민이 사는 곳을 보니 정말 광고에서 나오는 듯한 그런 곳이었다. 여러 가구가 한 곳에 모여 살고 있었는데 나무로 지어 허름하고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화장실을 보고는 정말 경악을 했다. 지푸라기 같은 것을 엮어서 칸막이처럼 울타리를 3/2 정도 세워 놓았는데 그곳에서 볼일을 본다는 것이다. 문도 없다. 심지어 닭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기까지 했다. 그때 제발 화장실 가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원주민은 정말 다정하고 순박하였다. 때 묻지 않은 사람들은 친절하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어느 정도 이곳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문득 한국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친절하고 다정하다지만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 없는 이곳은 너무나 외롭기만 했다. 그래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생각 나는 친구들 가족들에게 편지했다. 동생이 군대에 있던 시절이라 편지를 더 많이 보냈던 것 같다. 답장이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외로운 날들은 편지의 답장으로 위로를 받으며 지냈다.


점점 익숙해져 가는 말레이시아의 생활이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드디어 이 여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아이들에게 내가 살던 곳으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곧 그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아이들과 한 명 한 명 사진을 찍으며 추억에 담았다. 그때 아이들 한 명 두 명이 나에게 다가와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작은 연필 한 자루, 허름한 열쇠고리, 작은 손때 묻은 인형 등등 자신이 아끼는 물건들을 주었다. 그 순간 눈물이 왈칵 났다. 그렇게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밀던 보물 같은 선물을 가지고 나는 공항으로 향했고 다시 내 나라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가끔 사진들을 꺼내어 보며 그날들을 추억하기도 한다. 그때의 경험이 발판이 되어 나는 많이 성장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는 더는 친구의 도움으로 음료를 리필하는 일은 없다. 조금은 자신감을 가진 나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아이들을 떠올리며 주어진 삶에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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