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하지 않는 삶은 단정한 마음을 가져다준다.

by 신새벽

아침 8시 59분. 작은 돌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마치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사람이 된 거 같은 기분이다. 예전 같았으면 사무실에 막 도착해 옷과 가방을 대충 책상 밑으로 욱여넣고 노트북을 켠 다음 마우스 휠을 정신없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을 시간. 그마저도 자리에 앉은 지 오분도 채 되지 않고 일어나 종이컵에 믹스커피 봉지 끝을 두 번 손으로 탁탁 뜨거운 물을 붓고 대충 휘휘 저어 입천장이 델까 첫 모금은 조심스레 마신다. 몸속으로 오늘의 시동을 걸 최소한의 연료를 주입하듯 커피를 마시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나면 또 한 번 나의 버텨야 하는 하루가 시작되곤 하였다.


사실 나는 카페인에 취약한 사람이다. 강한 카페인이 몸속에 들어오면 심장이나 손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럼에도 도시의 노동자로 살 때는 카페인이 주는 각성 효과를 뿌리치지 못했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커피를 찾아다닌 게 맞을 것이다. 야근을 하는 날이면 테이크아웃해 온 커피만으로 모자라 믹스커피 세 봉지를 한꺼번에 타 마시기도 하였다. 분명 내 몸에 무리인 줄 알았지만 커피만큼 나에게 당장의 효과를 가져다주는 건 없었다. 아마 k직장인들의 몸에는 커피가 혈액처럼 흐를지도.


요즘은 아침에 연하게 내린 커피 한 잔, 점심을 먹고 마시는 믹스 커피 한 잔 이런 루틴으로 마신다. 여러 모금에 나누어 조금씩 천천히. 심장이나 손의 떨림을 걱정하는 일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커피가 일상에 자리하는 건 변하지 않았지만 내 삶의 여백이 늘어나자 카페인의 절대 권력은 나에게 무의미해졌다. 이제 커피는 간절한 연료가 아니라 즐겁게 누리는 향미이다.


도서관에서 보고 싶은 책만 빌려 읽으며 살아도 지루하지는 않겠다.

고양이들과 오순도순 서로 곁을 내주며 살아도 심심하지는 않겠다.

작은 돌집에서 시간과 계절을 음유하며 살아도 적적하지는 않겠다.


일상을 보내다가도 문득문득 이런 생각들이 찾아왔다. 더 이상 무리하지 않는 삶이 가져다준 단정한 마음이 생기는 순간들이다. 아침이면 고양이와 눈을 맞추며 "잘 잤어?" 인사를 하고 한낮에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가고 그 계절만의 적당한 볕과 바람을 느끼는 것이 무릇 별거 아니게 보일 수 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 하면 모두 시간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과거의 나는 저런 별거 아닌 것들을 하기 위해서도 일부러 시간을 냈었어야 했으니까. 늘 시간과의 줄다리기에서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사는듯한 느낌이었다. 손과 발에 조금이라도 힘을 빼거나 긴장을 늦추는 순간 지고 마는 나의 시간이었지만 내 것이 아닌 시간이었다. 무리하지 않는 삶이 분명 삶의 여백을 만들어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작은 삶의 여백이라도 만들어내기 위해 사실은 다양한 무리들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진짜로 궁금한 건 하나였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사는가.


무리하지 않는 삶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일은 얼마큼 해야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는 게 적당하며 취미는 얼마까지 투자하는 게 취미라고 부를 있는 것이고 때마다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은 얼마여야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금액일까. 여전히 선명하지 않고 정답도 없는 세상살이.


다만 이따금 단정한 마음들이 찾아올 때 나는 이제 좀 '나'라는 책을 차분히 읽으며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 밑줄을 긋는듯한 이 느낌이 너무 소중하다. 하루 중에서도 아침, 산 중에서도 숲길, 드라마 중에서도 일드, 음악 장르 중에서도 클래식, 재즈와 보사노바 등 내가 더 좋아하는 것들로 하나씩 골라내어 다가올 날들에는 더 나다운 삶, 나다운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을 거 같은 용기가 내 마음 어딘가에서 자라나고 있다. 이제야 이런 것들이 조금은 선명하게 보이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동안 나 하나도 제대로 모르면서 세상일에는 참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구나 싶었다. 사십 대가 되니 부끄러운 마음이 생긴다.


무리하지 않는 삶은 단정한 마음을 가져다준다. 나는 그저 욕심내지 말고 그 마음 하나 잘 가꾸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리하여 오십 대, 육십 대의 나는 지금보다는 조금 덜 부끄러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만을 바란다.